출처 :발자국

난 야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프로야구 시청은 단순히 좋아
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아예 시간 낭비로 치부하고 있으며 좋은
주말시간을 종일 TV 야구중계에 몰두하여 저혼자 울그락 불그락
일희일비하고 있는 화상들을 보면 화까지 치밀어 오르곤 한다.

프로야구의 오묘함을 맛보지 못한 자의 무식한 선입견이라 비난
한다면 굳이 대꾸할 말이 없지는 않으나 그건 오늘의 본론이 아
니기에 생략하도록 하고 여기선 한 야구인의 죽음을 바라보는 또
다른 야구인의 글이 마음속에 내내 찡한 여운을 남기고 있기에
그것을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한다.


독불장군 김동엽.
좋은 사람에게는 한없이 좋았던 반면 그만큼 적도 많았던
김동엽은 평생을 살아 오면서 호평보다는 비평이 더 많이
따라붙었던 야구인이었다. 그러나 친구보다, 가족보다, 그
리고 술보다 야구를 더 좋아했던 영원한 야구인 김동엽의
<야구사랑>만큼은 있는 그대로 챙겨주는 것이 야구후배들
의 몫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야구해설가 하일성이 4월 15일자 동아일보에 기고한 짤막한 글의
끝부분이다. 프로야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 만큼이나 떠벌
이 하일성의 주제넘는 언행들을 평소 탐탁치 않게 여겨오던 나였
지만 그 글을 읽고서는 밀려드는 숙연함에 한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않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야구 문외한인 내게 있어 김동엽이란 사람은 한때 빨간
장갑을 끼고 요란한 제스츄어로 팬들에게 눈요기거리를 선사하던
탤런트 감독의 이미지 정도로 남아있다. 운동 선수가 운동실력
외적인 것들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카메라나 의식하고 하는게
요즘 아이들 관점에선 소위 "끼"가 있네 "스타의식"이 있네 하면
서 긍정적으로 평가될지 모르지만 내 보기엔 부족한 실력을 은폐
하기 위한 얄팍한 잔머리 굴리기에 불과할 따름이다. 꽤 시간이
흘렀지만 과거 코미디 하듯 현란한 몸짓으로 잠시 인기를 끌다가
기어이 비참하게 두드려 맞고 케이오 당해 물러난 '김사왕'이란
복서를 전형적인 그런 류의 운동선수로 들고 싶다.

따라서 난 유사한 부류로 보였던 김동엽씨 또한 차라리 야구 때
려 치우고 자신의 장기인 그 탁월한 입심을 살려 일찌감치 연예
계로 진출하는 것이 다른 야구인들을 덜 욕보이는 것이라 내심
생각하고 있었을 즈음 김씨 역시 야구계 일선을 떠나 방송에 좀
들낙날락 하더니만 어느 틈엔가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가다가
몇일 전 변을 당해 풍운아 같은 일생을 마감하고야 말았다.

고인에 대한 험담은 예의가 아닐 것이나, 그의 돌연한 사망을 보
도한 신문보도를 유심히 보면 세간에 회자되는 그를 둘러싼 루머
들이 한두가지 소개되는 것을 알 수 있고 대부분 예외없이 별로
유쾌하지 못한 내용들이었다. 그러던 차에 이번 하일성의 김동
엽 추모 기사는 같은 길을 가는 사람으로서 고인에 대한 진솔한
평가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김동엽씨의 사생활이 어떠했고 기인으로까지 불린 그의 성격이
어떠했던 간에 가장 지근거리에서 고인을 잘 알던 같은 야구인
하일성의 가슴에는 그런 것들은 간데없고 오로지 김씨의 뜨거웠
던 "야구사랑"만이 우뚝 거대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
이 콧등을 찡하게 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 다른 사람들은 내 삶의 무엇을 기억해
줄 것인가. 또 내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기려줄 만한 일생에서
내가 쏟아부었던 대표적인 열정은 무엇일까. 과연 있기나 한가.


나는 그런 점에서 고 김동엽씨가 정말 너무나도 부러웠다. 뜨거
웠던 자신의 야구사랑을 그렇게 살뜰하게 기억해주는 후배가 있
으니 아마도 고인은 뿌듯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으리라.


최근에 아쉽게도 헤어지게 된 나의 지인 중에 좀 특이한 분이 있
다. 그 양반의 고민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유언을 가족이 동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먼 훗날의 일이 되겠지만 그분은
자기가 죽었을 때 시신을 화장하여 평소 자신이 즐겨 찾던 지리
산이나 설악산 같은 이땅의 아름다운 산하에 뿌려달라는 주장이
가족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실제로 어찌될런지는 알 수 없으나 난 그분이 그 이야기를 하면
서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자기 후손들이 설악산이나 지리산을 찾
으면서 여기가 바로 우리 아버지요, 할아버지가 묻히신 곳이라
이야기를 나눌 것이고 그래서 그곳의 이름없는 꽃한송이 하나,
풀한포기 하나라도 소중히 생각하지 않겠느냐며 감상에 젖은 눈
길로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비록 지금
은 떨어져있고 또 언젠가는 이 삶에서도 이별을 해야겠지만 내가
좀더 이땅에서 오래 호흡을 한다면 그때에도 분명히 그분의 뜨거
웠던 그 <자연사랑>만큼은 내 잊지않고 주위에 전하며 뜻을 기
릴 것이다.

이땅을 살면서 온몸을 불사르는 뜨거운 사랑 한번 못해보는 것
처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허물이 아무리
많더라도 우리가 세상을 떠난 후 그것들은 서서히 잊혀져가기 마
련이다. 단 그 허물들을 태워버리고도 남을 만한 우리의 "뜨거
운 사랑"이 세상에 남은 자들의 가슴에 아로새겨져 있는 한에서.

- 97/04/16 clinchem -

Posted by Man
:
BLOG main image
우리 모두 함께 나누는 세상을 만들어 가요~ 함께하는 세상, 함께 나누는세상 엔라이프 포유 by Man

카테고리

함께 나누는 세상 (336)
세상엿보기 (73)
역사와 사람들 (29)
지리와 지명 (1)
게임정보 (0)
맛과 풍경 (23)
유용한정보 (142)
컴퓨터정보 (68)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Total :
Today :
Yesterda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