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의 특성

조선은 지구상에 존재했던 그 어느 왕조보다 임금 독살설이 많았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왕조의 역사가 유달리 장구했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실제 조선뿐 아니라 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고려 왕실이 모두 500~800여 년 존속했다. 정확한 분류는 아니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개의 왕조는 200~300여 년을 주기로 생성과 멸망을 거듭했다. 왕조의 존속 기간이 중요한 것은, 왕조나 국가의 생명 사이클이 비슷한 경로를 거치기 때문이다. 국가나 왕조는 ‘창업기-성장기-발전기-쇠퇴기-소멸기’라는 생명 사이클을 지닌다. 만약 발전기가 길다면 그 왕조의 국력은 한없이 뻗어 나가는 것이다. 발전기가 끝나면 정체기 또는 쇠퇴기라는 시련이 찾아오는데, 그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면 망하게 된다. 그런데 조선은 쇠퇴기, 멸망기에 접어든 이후에도 무려 3세기 이상을 존속한 특이한 국가였다. 이런 기록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다.

 

지배계급인 사대부들이 피지배계급인 농민들 위에 군림했던 조선의 사회 체제는 임진왜란으로 사실상 종말을 고한 셈이었다. 개국 초에 조선은 사대부, 일반 백성 할 것 없이 모두 병역의 의무를 지는 양인개병(良人皆兵)의 국가였다. 그러나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가 실시되면서 양반들의 병역 의무는 점점 유명무실해지더니, 급기야 중종 때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로 바뀌면서 합법적으로 면제되었다. 개국 후 2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조선의 양반들은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기생충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처럼 권리만 있는 양반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었으니 임진왜란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 후에도 무려 300년이란 세월 동안 사대부들은 통치자로 군림했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생명의 연장이었다. 국왕 독살설이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16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유포되기 시작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국왕 독살설은 왕조 국가의 대표적인 비정상적 정치 행태다. 다시 말하면 이미 생명력이 다한 왕조 국가가 물리적이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수명을 유지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국왕 독살설’인 것이다.

 

국왕의 권한 : 왕조 국가인 조선의 국왕은 일본의 천황처럼 허수아비는 아니었고, 중국의 황제처럼 절대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이론상의 절대권력이었을 뿐 실제 조선의 국왕은 신하들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았다. 조선에서 왕권이 위협받고 심지어 독살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당론이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사대부들은 왕명이 아니라 당명을 따랐다.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적인 특색이 있다. 독살설의 배후에 그 임금을 반대했던 정당이 존재하며, 숙종 즉위 때를 제외하면 임금이 죽은 후 어김없이 그 당이 집권한다는 점이다. 이는 특정 정당이 특정 임금과 정치적 갈등이 극대화되었을 경우 임금을 갈아치우는 것을 해결책으로 선택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리고 이는 또한 임금이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한 정당이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였음을 뜻하는 동시에, 신하들이 특정 임금을 배척할 수도 있었음을 뜻한다. 이를 신하가 임금을 선택했다는 뜻의 ‘택군(擇君)’이라 하는데, 국왕 독살설은 그야말로 이 ‘택군’의 결과였다.

택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국왕을 독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임금을 공개적으로 갈아 치우는 것이다. 왕을 갈아 치우는 것을 ‘반정(反正)’이라 한다. 그나마 ‘정도(正道)로 돌아가다’는 뜻의 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내쫓을 명분과 힘을 지니고 있는 경우였다. 이 택군의 논리야말로 조선시대 국왕 독살설을 만들어낸 정치 용어이자 왕조 국가 조선이 말기까지 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조선의 국왕 독살설에 휘말린 인물은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를 포함해 9명이나 된다. 여기에 일각에서 주장하는 예종까지 포함시키면 무려 10명이나 되는 셈이다. 27명의 임금 중 무려 8명의 임금이 독살설에 휘말렸다는 것은 조선이란 정치 체제에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단순히 ‘조선’이란 과거의 왕조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한국을 연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방계 승통의 콤플렉스와 임진왜란 속에서 - 제14대 선조(1552~1608년, 재위 1567~1608년)

 

중풍과 찹쌀떡

조선조 전체를 통틀어 선조만큼 다사다난했던 임금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선왕의 적장자가 아니면서 왕위에 오른 방계 승통부터가 비상(備嘗)한 재위 기간을 암시하는 것이다. 선조 때 일어났던 임진왜란과 동서 분당은, 조선이 이미 이전의 방식으로는 통치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하였다. 서울을 버리고 북으로 도망간 임금, 명나라로 도망가려다가 압록강에서 겨우 멈춘 치욕의 군주가 바로 선조였다. 뿐만 아니라 선조는 무려 40년 이상 재위에 있었으면서도, 죽은 뒤 독살설에까지 휘말리게 된다.《선조실록》에서는 선조가 병으로 죽었으며 마지막 임종을 지킨 여인이 부인 인목대비라고 기록하고 있다. 선조 독살의 혐의를 받고 있는 광해군과 북인 측의 기록인《선조실록》을 살펴보자.

 

그에 따르면 재위 40년 가을 선조는 병세가 위독해져 기(氣)가 막히면서 갑자기 넘어졌다. 의약청에서는 풍기, 즉 중풍에 가까운 증세라고 진단했다. 광해군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었을 때 선조의 병은 다시 위독해진다. 세상을 떠난 해인 재위 41년 1월부터 선조는 병세가 다시 심해져 약방의 입진을 받았다. 그해 2월 1일 약방의 문안을 받고 “어젯밤엔 편히 잠을 잤다.”고 말했던 선조는 오후부터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었다. 그날 인목황후가 선조의 병상을 지키고 있었는데 여러 대신이 “고례(古禮)에 부인의 손에서 임종하지 않는다.”며 왕비에게 밖으로 나와 달라고 요청하는 와중에, 안에서 곡성이 들려 비로소 선조가 세상을 떠난 것을 알고 모두 통곡하였다. 서인 측의 기록인《광해군일기》에는 선조 독살설에 대한 서인 측의 유일한 근거이기도 한 찹쌀밥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과연 선조는 북인 측의 기록처럼 병사한 것일까, 서인 측의 기록처럼 독살당한 것일까?

 

을축년에 하교받은 하성군 : 문정왕후는 인종 독살설을 무릅쓰고 아들을 명종으로 즉위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더 이상 자신의 핏줄에게 왕위를 잇게 하지는 못했다. 문정왕후의 유일한 손자이자 명종의 외아들인 순회세자가 요절했기 때문이다. 명종은 재위 20년에 문정왕후가 사망함으로써 친정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문정왕후의 기세에 눌려 있던 세월이 병이 되었는지, 명종도 문정왕후 사망 2년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명종이 사망했을 당시 가장 큰 문제는 후사가 없는 것이었다. 자칫하면 왕위가 비는 비상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대신들은 할 수 없이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에게 후사를 결정해 달라고 요청하여 답을 받았는데, 이를 ‘을축년의 하서(下書)’라 한다. 이때 명종의 뒤를 이은 종친이 덕흥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 이균이다.

 

덕흥군은 중종이 창빈 안씨에게서 난 아홉 번째 아들이었다. 중종의 아홉 번째 서자의 세 번째 아들이니 선원보(璿源譜: 조선 왕실 족보)대로라면 이균은 왕위를 꿈꿀 수도 없는 처지였다. 다시 말해 하성군의 승통이 그만큼 정통성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하성군 또한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한참을 사양한 후에야 용상에 올라 백관의 하례를 받고 임금이 되었다. 그러고는 곧 인순왕후를 왕대비로 높여 수렴청정하기로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드디어 방계 승통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때 즉위한 하성군이 임진왜란을 겪고 이리저리 피난 다니는 수난의 군주 선조였다.

 

즉위 당시 선조는 가례를 올리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재위 2년(1569년) 12월에 박응순의 딸을 간택해 국혼을 치렀다. 그녀가 선조의 첫 번째 부인의 의인왕후 박씨다. 선조는 방계 승통이라는 콤플렉스를 씻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비 소생의 원자에게 후사를 넘기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박씨가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선조는 6명의 후궁에게서만 왕자 13명과 옹주 10명을 낳았는데, 이 13명의 아들 중에서 누가 선조의 뒤를 잇느냐 하는 문제가 민감한 정국 현안이 되었다.

 

선조의 추락, 광해군의 부상 : 정확하게 개국 200년 만인 1592년 발생한 임진왜란은 조선의 모든 체제를 송두리째 뒤엎었다. 조선통신사의 정사로 일본에 다녀온 후 “일본이 침략할 것 같다”고 했던 황윤길 보고는, “침략의 조짐이 없다”는 부사 김성일의 상반된 보고에 묻혀버렸다. 황윤길은 야당인 서인인 반면 김성일은 집권당인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적군은 서인만을 골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를 공격한다는 기본적인 안보 법칙마저 당리당략에 묻혀버린 것이다. 결국 아무 대비 없이 임진왜란을 맞은 선조는 군부(君父)로서 왜적을 물리치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걸겠다는 자세보다는 일신을 보존하는 일에만 골몰해, 왜적이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울을 버리고 달아나기로 하였다. 국왕을 정점으로 한 사대부가 농민을 지배하던 조선의 국가 체제는 완전히 붕괴된 것이다.

 

광해군은 이처럼 국가 체제가 붕괴된 폐허 상태에서 세자로 책봉되었다. 어렵사리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광해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살리는 고난이었다.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分朝)의 임무를 맡은 광해군은, 맹산ㆍ곡산ㆍ이천 등지를 순회하며 왜군을 교란시키고 백성들을 위무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돌을 맞는 수모까지 당한 선조는, 해전에서의 이순신의 활약과 육전에서의 의병과 명나라 도움으로 위기를 한 고비 넘기자 광해군에 대한 마음이 다시 흔들렸다. 정유재란이 끝난 후인 1600년 의인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그 2년 뒤 51살 되던 해 김제남의 19살짜리 딸을 새로운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녀가 바로 인목왕후다.

 

국혼 4년 후에 인목왕후가 왕자를 낳으면서 조정엔 세자를 둘러싼 새로운 움직임이 일었다. 이때 태어난 영창대군은 선조가 바라 마지않던 정비 소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재위 40년 가을 들어 선조의 병세가 갑자기 심해졌다. 34살의 장성한 세자를 폐하고 강보에 싸인 2살의 아이에게 왕위를 넘길 수는 없었다. 결국 선조는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병세가 조금 나아지자 선조의 마음이 또다시 변한 것이다. 이것이 선조의 성격이자 통치술이었다. 선조는 동ㆍ서인은 물론이고 아들 광해군도 믿지 못했다. 그러나 광해군을 쫓아내기에는 선조의 병세가 너무 깊었다. 드디어 재위 41년 2월 1일, 선조는 다사다난하고 파란만장했던 선조 시대는 이처럼 후계 문제를 두고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35살의 세자 광해군이 즉위했다.

 

반대파 숙청에서 폐모까지 : 세자에게 전위하겠다는 선조의 교서를 거부한 세력에게 광해군의 즉위는 두려운 일이었다. 광해군이 소북을 처단하고 자신을 지지했던 대북에게 정권을 넘겼으나 이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왕위를 위협할 수도 있는 위치에 형인 임해군의 존재가 남아 있었다. 만약 임해군이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처럼 현명했다면 골육상쟁의 비극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끝은 아니었다. 광해군과 대북 세력에게 임해군 이상의 위협적인 존재는 영창대군이었다. 영창대군의 외조부자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인 김제남은 영창대군이 성장함에 따라 더욱 위험한 생각을 하게 되었고, 대북 정권이 그를 의심하게 되면서 사태는 비극으로 치달았다. 만일 광해군과 대북 정권이 영창대군 살해라는 극단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최소한 목숨은 부지시켜주는 온건한 방법을 택했다면 서인들의 쿠데타 명분은 궁색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친아버지와 형제를 죽여버린 광해군과 대북 정권은, 더 이상 인목왕후를 대비로 모실 수 없었다. 이들은 3년 후에 드디어 폐모론을 주창하였다. 광해군과 대북 정권은 드디어 광해군 10년 인목대비를 폐하고 존호를 깎아 서궁(西宮)으로 칭하면서 유폐시켰다. 비록 광해군은 명과 청 사이에서 현실적인 외교 정책을 수행하고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민생을 위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아무리 임금이라 해도 조선의 지배 이념인 성리학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광해군 15년(1623) 3월, 서인들이 광해군의 조카뻘인 능양군을 추대하는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이것이 바로 인조반정이다.

 

문제의 찹쌀밥 : 선조가 광해군에 대한 감정이 악화된 상태에서 급서하다 보니 독살의 의혹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유력한 물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광해군일기》에는 선조 독살설에 대해 서인 측이 유일한 근거로 삼은 찹쌀밥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선조가 승하하는 당일 “미시(오후 1~3시)에 찹쌀밥을 올렸는데, 상(上: 상감의 준말)이 갑자기 기(氣)가 막히는 병이 발생하여 위급한 상태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바로 이 찹쌀밥을 세자가 들였다는 것이 서인들의 주장이다. 이처럼 선조 독살설은 인조반정 후에 조직적으로 유포되었지만 구체적인 근거는 미약하다. 광해군의 선조 독살설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인물은 인목대비였다. 반정 주역들이 광해군의 주륙(誅戮)에 동의하지 않자 인목대비는 드디어 광해군이 선조를 시해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여기서 광해군의 선조 독살설은 큰 혼선을 겪는다. 지금껏 서인들이 퍼뜨린 선조 독살설의 줄기는 찹쌀밥에 의한 독살이었다. 그러나 인목대비는 엉뚱하게도 “고의로 충격을 주었다”는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이다. 이처럼 선조의 독살 여부에 대해 가장 잘 알 만한 위치에 있었던 인목대비가 ‘찹쌀밥’ 대신 이런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은 선조 독살설이 두서없이 전개되었다는 한 반증이다.

 

이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숙종 때의 일부 기간을 제외하고는 서인이 계속 집권함에 따라, 선조 독살설은 하나의 사실처럼 굳어졌다. 쿠데타를 일으킨 서인 정권은 자신들이 왜 광해군을 폐출했는지를 내외에 설명해야 했다. 결국 서인들은 선조 독살설을 집권의 정당성으로 삼기로 했다. 그러나 아무 물증이 없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제기하지 못하고, 비공식적으로나마 조직적으로 선조 독살설을 유포했던 것이다. 만약 선조 독살설이 사실이라면 서인 정권이 반정 후에도 이를 공식화시키지 못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사라진 북벌의 꿈 - 제17대 효종(1619~1659년, 재위 1649~1659년)

 

종기와 어의 신가귀의 산침

효종은 문치(文治)의 나라 조선에서 무치(武治)를 하려 한 특이한 임금이었다. 그러나 무치는 당연히 사대부들의 격렬한 반발을 낳았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효종은 송시열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북벌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당연히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효종의 증세가 처음에는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의혹은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효종실록》에 처음 병세가 기록된 날은 재위 10년 4월 27일이다. 머리에 난 작은 종기의 독이 점점 퍼져 얼굴에까지 번졌는데, 당시 이런 증세는 그리 심한 것이 아니었다.

 

종기를 진단한 처방은 산침(散鍼)이었는데, 이를 통해 독기를 배설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효종은 계속 산침을 맞았다. 그런데 이 와중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문제의 어의 신가귀(申可貴)다. 당시 병으로 집에 있었던 신가귀는 효종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철문 밖에 나아가 입궐을 청했다. 이때 다른 어의 유후성이 경솔하게 침을 놓아서는 안 된다며 말리고 나섰으나, 효종은 침을 놓으라고 명했다. 그러나 신가귀가 침을 놓은 후 피가 그치지 않고 계속 솟구친 것이다. 《효종실록》에는 침이 혈락(血絡)을 범한 탓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문제는 침을 놓은 신가귀가 손이 떨리는 증세, 즉 수전증 상태였다는 점이다. 신가귀가 일부러 효종의 혈락을 범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수전증의 어의가 옥체에 침을 놓는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신이 혼미해진 효종이 삼공(三公)과 송시열, 송준길 그리고 약방제조를 부르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들이 달려가 어상 아래 부복했을 때 효종은 이미 승하한 상태였다. 그야말로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북벌 군주 효종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모든 것은 북벌로 :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효종)의 세자 책봉은 그의 정치 공작의 결과라기보다는 소현세자(인조의 장자이자 효종의 형)의 정치관이 친청적으로 변한 데 대한 반대급부의 성격이 짙다. 소현세자의 유산은 효종이 즉위했다 해서 그냥 묻어버리기에는 너무 많았다. 소현세자의 비(妃)인 강빈 일가의 억울한 죽음도 소현세자가 남긴 유산의 하나였다. 강빈은 누가 보더라도 시아버지 인조에 의해 누명을 쓰고 죽은 불쌍한 며느리였고, 그 식구는 사돈에 의해 멸문된 불쌍한 가문이었다. 불씨를 안은 채 잠복해 있던 강빈 신원 문제는 효종 5년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 황해 감사 김홍욱은 강빈이 저주 사건을 일으키고 인조의 음식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를 모두 부정하면서 무죄라고 주장했다. 만약 강빈 옥사를 재조사한 결과 사건 자체가 조작임이 밝혀질 경우, 그 파장에 대해서는 효종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강빈이 무죄라면 강빈의 자식이란 이유로 유배형에 처해져 제주에서 죽어간 두 아들도 당연히 신원되어야 했으며, 나아가 셋째 아들 석견이 생존해 있었으므로 종통(宗統)문제가 제기될 수 있었다. 계속되는 국문에도 굴하지 않던 김홍욱은 결국 장사(杖死)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에 산림(山林: 조선 중기 민간에서의 학문적 권위와 세력을 바탕으로 정치에 참여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은 크게 반발했다. 즉 이는 조선의 지배자가 국왕과 사대부냐 아니면 국왕뿐이냐 하는 본질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가 효종 재위 10년간 국왕과 사대부 사이에서 벌어진 충돌의 근본 원인이 된다. 장남 소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까지 왕좌를 지키고자 했던 인조도 자연의 순리를 거역할 수는 없었다. 인조는 소현세자 사후 4년만인 1649년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정변과 호란 그리고 음모와 독살로 점철된 27년간의 재위 기간을 마감했다. 그 뒤를 이은 인물이 바로 효종,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다.

 

북벌만이 자신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 시켜준다고 믿은 효종은, 북벌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주자학이 아니라 군사력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사고의 배경에는 8년간에 걸친 심양에서의 볼모 생활이 있었다. 효종 또한 소현세자와 함께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흥기를 똑똑히 지켜보았다. 두 사람 모두 청이 승리한 이유가 학문이 아닌 군사력의 우위에 있음을 보았으나, 청에 대한 입장은 완전히 달랐다. 소현세자는 현실을 인정하고 청과 선린 관계를 구축한 후 국가 발전에 매진하는 것이 조선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봉림대군은 달랐다.

청과 싸우려면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효종은, 강력한 숭무(崇武) 정책을 추진했다. 효종은 그의 현손(玄孫)인 정조와 함께 조선 후기 숭무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군주였다. 당시 조선은 문신이 군사 지휘권을 가진 특이한 나라였다. 바로 이런 점이 조선의 군사력을 약화시킨 원인의 하나였다. 이에 대해 효종은 강력한 군비 확장 정책을 펼쳤는데, 군비 확장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려는 효종의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사대부들과의 마찰도 강해졌다.

 

북벌 대 춘추대의의 대타협 : 조선의 사대부들은 구조화된 문치주의 아래서 지배계급의 지위나 계속 유지하려고 했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들은 2번에 걸친 국가적 전란을 겪으면서도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지배 세력이었다. 이것이 바로 효종의 딜레마였다. 즉 이들을 배제하고는 북벌도 군비 확장도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없었던 것이다. 효종은 문신들의 반발을 억누르며 군비 확장을 강행했는데, 재위 8년째가 되자 문신들이 효종의 숭무 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군비 확장에 반대하는 명목상의 이유는 백성들의 민생을 먼저 생각하라는 이른바 안민책이었다. 그러나 당시 농민 생활을 파탄에 빠뜨린 주범은 군비 확장이 아니라 불평등한 세금 체계였다. 농민들은 짓누르던 군역을 양반 사대부들은 면제받고 일반 백성들만 부담하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양반 사대부들은 이런 불균등한 조세 체계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에는 극력 반대하면서도, 말로는 농민 생활의 피폐를 구실로 군비 확장에 반대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효종 8년(정유년) 산림의 영수 송시열이 올린 <정유봉사(丁酉封事)>였다. 봉사란 남이 볼 수 없게 밀봉한 상소문을 말한다. 송시열은 총 19개 항목에 걸쳐 국정의 모든 문제에 대해 진언했다. 송시열은 오늘날까지 효종 북벌 이론의 제공자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그의 사후 노론의 문인 제자들이 자가 발전시킨 것이고, 실상은 북벌의 반대자였다. 당시 민생을 살리기 위해 가장 시급한 관제는 구체적으로 양반 사대부들로 하여금 봉건적인 특권을 포기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양반들도 일반 백성처럼 국역의 의무를 지는 것이 민생 안정의 첩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송시열은 효종이 사대부를 우대하지 않는다며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송시열 같은 조선 사대부들에게 나라는 임금의 것이 아니고 천하의 것이었다. 물론 여기서 ‘천하’는 만백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대부’를 뜻하는 것으로, 나라는 임금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대부의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정유봉사>는 송시열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조선 사대부, 특히 서인 산당(山黨)의 의견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군사를 일으켜 북진하는 것이 효종의 북벌이라면, 산당의 북벌은 말로만 춘추대의를 외치는 것이었다. 이들을 설득하지 않고서는 군비 확장이고 북벌이고 모두 소용없음을 안 효종은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다. 효종은 자신이 뒤로 물러서고 산당에게 정권을 내주기로 결심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북벌을 적극 추진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보기 드문 군주와 신하 사이의 대타협이었다. 송시열과 송준길, 이른바 양송은 효종이 자신들에게 정권을 맡긴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이제 자신들이 반대하던 군비 확장을 적극 추진해야 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송시열의 북벌관은 실제로 만주와 중원을 점령하는 군사적 정벌이 아니라, 청나라가 약해지면 국교를 단절해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자는 시대착오적이고 사대주의의 극치인 명분론에 불과했다. 효종의 전폭적 신임을 바탕으로 북벌을 소리 높여 외쳤지만 조선의 국력으로 북벌은 불가능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북벌이 불가하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 순간 효종과 맺은 암묵적 연합 전선은 깨질 것이고 산당은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야 했으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협곡이었다. 이때 송시열을 구해 주는 뜻밖의 사태가 발생한다. 효종이 급서한 것이다. 송시열과 독대(조선에서 국왕은 반드시 승지와 사관이 입회한 자리에서 정사를 처리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국왕과 신하의 독대는 매우 이례적인 행위였다. 효종과 송시열의 독대는 효종 10년 기해년에 있었다고 해서 ‘기해독대’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독대다)한 두 달 후 효종은 머리에 난 작은 종기가 원인이 되어 어의 신가귀에게 침을 맞다가 세상을 떠났다.

 

현종이 문제 삼은 어의 이기선과 송시열 : 정말 효종은 혈락을 범해 사망한 것일까? 효종의 시신에 부기가 있었던 것은 그의 갑작스런 죽음과 아무 관련이 없을까? 즉위년 6월 현종은 어의 이기선 문제를 제기한다. 현종은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에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효종비 인선왕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의 이기선이 갑자기 발을 뺀 것이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현종은 분명 이기선에게 문제가 있음을 감지하고 엄형을 가해 사실을 알아내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기선을 옹호하고 나선 세력이 있었다. 바로 송시열 등의 산당이다. 결국 이기선은 송시열의 주청으로 사지(死地)에서 구원되었다. 산당 세력이 신가귀 등은 굳이 빨리 형을 윤허할 것을 청하면서, 이기선은 왜 옹호하고 나섰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의혹들을 남긴 채 효종은 세상을 떠났고, 조선은 다시 극심한 문치(文治)의 나라로 돌아갔다.

 

개혁 군주의 좌절 - 제22대 정조(1752~1800년, 재위 1776~1800년)

 

홧병과 연훈방

경종 시대부터 조선의 당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전의 당쟁은 신하들 사이의 투쟁이었을 뿐 적어도 임금 자체를 적으로 삼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종 때부터 신하들은 임금에게도 당적을 붙이고, 당이 다를 경우 적으로 돌렸다. 임금도 당색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경종이 소론 군주였다면 영조는 노론 군주였다. 그리고 그런 영조 밑에서 반노론의 기치를 들었던 사도세자는 부왕 영조와 노론에 의해 비참하게 뒤주 속에서 죽어갔다. 사도제자의 비극은 그가 영조의 외아들이란 점에서 극대화된다.

 

사도세자의 네 아들 중 세손인 산(정조)만이 세자빈 혜경궁 홍씨 소생이고, 나머지는 모두 세자의 후궁인 양제가 낳은 아들이었다.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는 세손을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켰다. 반드시 삼종의 혈맥을 이은 사도세자의 아들이 즉위해야 한다면, 그 대상은 세손이 아니라 양제 박씨의 아들인 은전군이어야 했다. 나인 시절 빙애라고 불렸던 양제 박씨가 사도세자에게 죽음을 당했으므로, 그 아들 은전군은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세손의 처리를 놓고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홍봉한 집안이 분열되지 않았다면 세손은 즉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홍봉한은 세자의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이 시기에는 이처럼 장인이 사위를 죽음으로 몰 만큼 당론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아들인 세손이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혜경궁 홍씨 덕분에 정승의 지위에 오른 홍봉한은 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혜경궁 홍씨의 반대로 홍씨 가문이 분열되고, 홍씨 형제의 분열은 곧 노론의 분열이었다. 홍봉한은 세손에 대해 표면상 침묵했으나 동생 홍인한은 적극적으로 세손의 즉위를 반대하고 나섰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 당시 영조는 82살의 고령이었으므로 언제 세상을 떠날지 알 수 없었다. 국왕이 사망하면 대리청정하던 세자나 세손이 즉위하는 것이 조선의 국법이었으니, 만일 세손이 대리청정하고 있을 때 영조가 급서한다면 노론은 그의 즉위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영조는 세손에게 보위를 넘기기로 결심했다. 이번에도 역시 반대의 선봉에 선 인물은 홍인한이었다. 영조는 세손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조치를 취해 주었다. 바로 그 날 세손에게 순감군(巡鑑軍)을 수점하도록 한 것이다.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던 세손에게도 이제 군사가 생겼다. 호위군을 동원하겠다는 말을 들은 대신들은 두려움에 싸여 한 발씩 물러났다. 세손이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때 한 강직한 인물이 상소를 올려 세손을 편들고 나섬으로써 전기를 마련한다. 스물일곱의 젊은 부사직 서명선이었다. 대신들은 영조가 서명선의 상소를 들으며 몇 번이나 “옳다”를 반복했으므로 이 상소를 옳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끝내 모호한 말로 자리를 모면하려고 했다. 분노한 영조는 김상복과 판중추부사 이은, 김양택을 해임하고 대사헌은 삭직시켰다. 그리고 한익모와 홍인한은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지우도록 했다. 영조는 이런 조처를 내린지 3개월 만인 재위 52년 3월 세상을 떠났는데, 세손은 영조가 적절한 시기에 대리청정과 순감군 수점을 지시하고 대신들을 문책했기 때문에 즉위할 수 있었다.

 

11살 때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묵도한 소년이 스물다섯의 장년이 되어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가 바로 조선 후기의 마지막 개혁 군주 정조다. 정조는 즉위 당일 빈전 문 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며 이렇게 선언했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의 이 즉위 일성은 무덤 속의 사도세자를 다시 살려내는 말이자, 14년 전의 비극적 사건이 잠복한 불씨에 지나지 않음을 분명히 한 선언이기도 했다. 정조는 열흘 후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 묘호를 ‘영우원’, 사당은 ‘경모궁’으로 높이는 숭모 사업을 단행했다. 그리고 자신을 축출하려 했거나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에 대한 전격적인 숙청작업을 개시했다.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노론 강경파와 외척들을 공격하자 노론도 반격에 나섰다. 이들은 정조를 살해하려 했는데, 이를 3대 모역 사건이라고 한다. 정조 살해 계획에 앞장선 가문은 사도세자 죽음의 주범 중 한 명인 홍계희 집안이었다. 홍계희는 영조 47년(1771년)에 죽었지만, 정조 즉위 후 숙청을 당한 그의 아들들이 정조 암살의 길로 나선 것이다. 이 사건의 주모자인 홍계희의 아들 홍지해는 홍인한과는 스승, 제자 사이기도 했다. 결국 정조를 살해하려는 기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제 왕조 국가 조선에서는 국왕에 대한 충성이란 기본 원칙은 갈 곳 없고 당론만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상황이었다. 국왕은 전 조선의 국왕이 아니라 한 당파의 당인으로만 인정되었으며, 특히 노론은 자파의 국왕이 아닐 경우 국왕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정조와 노론은 이미 군신 관계가 아니라 정적 관계였다. 이런 정치 체제를 혁명적으로 개혁하지 않는 한 정조의 미래, 아니 조선의 미래는 없었다.

 

새로운 정치 세력을 찾아서 : 정조는 새로운 세력을 육성해 이들 세력을 대체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정조가 즉위년 9월에 ‘규장각(奎章閣)’을 설립한 것은 이런 인식의 소산이었다. 설립 당시 규장각은 왕실 도서관을 표방했으나 이는 새 조직에 대한 노론의 의혹을 완화시키려는 수사였고, 실제로는 당론에 물들지 않은 문신들을 양성해 개혁 정치 세력을 형성하려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었다. 규장각이 이렇듯 왕권 강화와 개혁 문신을 양성하기 위한 조직이었다면, 장용영은 왕권 강화와 개혁적 무신을 양성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정조는 재위 9년(1785년) 장용위를 만들어 국왕을 호위하게 했는데, 이 조직을 재위 17년 하나의 군영으로 확대시킨 것이 장용영이었다.

 

장용영은 크게 내영과 외영으로 나누어지는데, 내영은 서울이 중심이었고, 외영은 수원 화성이 중심이었다. 한편 장용외영의 중심이 수원 화성인 것은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와 관련이 있었다. 재위 13년 사도세자의 묘를 옮긴 곳은 수원 용복면의 ‘화산(花山)’이었다. 정조는 그곳을 현륭원(현 융건릉)이라 불렀다. 정조의 능행은 단순히 참배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정조는 규장각과 장용영, 사도세자와 현륭원 그리고 능행을 적절히 한 고리에 묶음으로써 노론 강경파를 무력화시키려 했다. 한편 정조는 노론도 등용하긴 했으나, 노론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갖고 있었으므로 이들을 대신할 수 있는 정치 세력을 찾았다. 그들이 바로 남인이었다. 남인들은 드디어 자신들의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고 믿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인들은 정조와 하나가 되기를 희망했는데, 그 연결 고리가 바로 사도세자였다. 그러나 정조에게 사도세자 사건은 진퇴양난의 협곡이었다. 그 비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이 정조 자신의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노론을 역적으로 몰아 제거하고 싶어했지만, 이는 당시의 정치 구조상 불가능했다. 정조는 남인들이 성장하기를 기다렸다. 정조가 남인들을 중용하려는 뜻을 밝힌 것은 재위 24년(1800년) 5월 30일의 연석(筵席)에서였다. 다음 번 재상 후보는 남인 이가환이나 정약용이었다. 그러나 남인들의 이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이 연석이 있은 불과 20여 일 후에 정조가 급서하기 때문이다.

 

나의 가슴속 화기가 어찌 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정조는 재위 24년 6월 14일 내의원 제조 등을 편전으로 불러 진찰을 받았다. 종기가 머리뿐만 아니라 등 쪽으로도 퍼졌으며 열기까지 올라와 후끈후끈했다. 이때 정조는 국왕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처방과 약 조제를 직접 관장했다. 정조는 어느 어의 못지않은 해박한 의학 지식을 갖고 있었다. 정조는 자신의 열 증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대개 이 증세는 가슴의 해묵은 홧병 때문에 생긴 것인데, 요즘에는 더 심한데도 그것을 풀어버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그런데 정조는 왜 자신의 종기 부위를 보여주지 않았을까? 정조는 그만큼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6월 23일 정조는 도제조 이시수에게 고통을 호소했다. 이날 노론 벽파 이시수는 경옥고를 쓰자고 주청했다. 이시수는 인삼이 들어가긴 했으나 온제(溫劑)와는 달라 해롭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정조는 처음 열 증세의 원인이 5푼의 인삼이 들어 있는 육화탕(六和湯)에 있는 것 같다며 거부했다.

 

6월 24일 정조는 민간요법인 연훈방(烟熏方)을 사용하기로 결심하였다. 모든 약이 효과가 없자 이 처방을 쓰기로 한 것이다. 6월 25일 정조의 증세는 한결 좋아졌다. 6월 26일 연훈방을 다시 사용한 정조는 이시수와 여러 의관이 종기 부위가 눈에 띄게 좋아져 며칠 가지 않아 나머지 독도 없어질 것이라고 하자 드디어 경옥고를 들었다. 하지만 경옥고를 든 후 정조는 잠자는 듯 정신이 몽롱한 상태가 계속되어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6월 27일, 정조는 이렇듯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정사를 걱정하였다. 그만큼 정조는 강인한 자기 제어 의지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 6월 28일, 드디어 운명의 날이 밝았다.

 

유일한 목격자, 정순왕후 : 정조의 병세 상황을 볼 때 정조 독살설과 관련해 문제가 되는 것은, 노론 강경파 이시수가 여러 차례 권한 경옥고와 정조가 세상을 떠나는 28일 등장한 한 여인, 바로 영조의 계비였던 대비 정순왕후 김씨다. 비상사태에 대비해 궁성을 호위하는 가운데 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등장하였다. 도제조 이시수가 “인삼차에 청심환을 개어서 끓여 들여보냈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드실 길이 없으니 천지가 망극할 따름입니다”고 말하자, 김씨가 의외의 명을 내렸다. “내가 직접 받들어 올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나시오.” 잠시 후 방 안에서는 곡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순간 대비 정순왕후가 다른 신하들을 물리치고 혼자 정조의 병석을 지킨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정조실록》에 정조의 임종 장면과 시간을 상세히 기록하지 못하고, “이날 유시(酉時: 오후 5~7시)에 상이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했다.”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기록한 것은, 정조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인물이 정순왕후 김씨였기 때문일 것이다. 영조 35년(1759년) 15살의 나이로 66살의 영조와 가례를 올린 김씨는 아버지 김한구와 함께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다. 세자(순조)의 나이 11살로 아직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면 왕실의 가장 어른인 정순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어 있었다. 실제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정순왕후 김씨는 계획대로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고, 이는 몰락했던 친정의 부활로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노론의 세상이 되었다.

 

정조 15년(1791년)경 천주교를 둘러싼 견해 차이로 정파가 분열되는데, 남인과 일부 노론 시파는 이를 받아들여 신서파(信西派)를 형성했고, 집권당인 강경파 대부분은 이를 공격하는 공서파(功西派)를 형성했다. 대체적으로 천주교에 관대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천주교에 대한 극단적 탄압은 없었다. 그러나 정조가 사망한 후 정권을 잡은 정순왕후는 노론 강경파와 함께 1801년 천주교를 탄압하는 신유사옥을 일으킨다. 명목은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금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신서파인 남인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둔 후에는 정권을 장악한 순조비 순원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조순이 안동 김씨 일족에 의한 세도정치를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 사회는 농업과 상업의 발달에 의한 신분제의 해체라는 시대적 요청을 받고 있었다. 즉 아래로부터의 변화에 의해, 사대부라는 소수 지배층이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전근대적 사회 체제의 개혁을 요구받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뿐 아니라 전 세계적 추세였던 개혁과 개방을 외면하고 오히려 보수와 폐쇄로 전환한 세도정치는, 역사의 반동이자 후퇴였으며 사실상 조선의 멸망이었다.

 

식민지 조선 백성의 군주 - 제26대 고종(1852~1919년, 재위 1863년~1907년)

 

해외 망명 계획과 식혜

서기 1863년 12월 조선의 25대 임금 철종이 창덕궁에서 사망했다. 철종은 14년간 재위에 있었지만 ‘강화 도령’이라는 그의 별명처럼 재위 기간 동안 사실상의 임금은 그가 아니라 ‘도령’을 ‘임금’으로 만들어 준 외척 안동 김씨였다. 그런데 철종이 서른셋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후사가 없었으므로 그의 뒷자리에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안동 김씨는 철종의 급서를 예상하지 못한 듯 준비된 정치 일정을 제시하지 못했다. 당시 왕실의 웃어른은 익종(翼宗)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의 빈 신정왕후 조씨였다. 드디어 안동 김씨를 누르고 친정 풍양 조씨가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흥선군의 아들 명복 :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에게 익종의 대통을 계승케 하라.” 이 전교는 조 대비와 흥선군 이하응이 결탁한 결과였다. 드디어 흥선군이 조선 역사상 처음 살아 있는 임금의 생부로 정국의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이나 인조의 아버지 능양대원군 그리고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처럼 사후에 추존된 예는 있으나, 생전에 아들이 임금이 되어 대원군이 된 예는 없었다. 즉위 당시 고종은 12살의 미성년이었으므로 대왕대비 조씨나 생부 대원군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대왕대비 조씨가 섭정을 양보함으로써 드디어 안동 김씨에게 ‘궁도령宮道令’이라고 무시당하던 몰락 왕족 흥선군이 대원군으로 정권을 잡게 되었다. 하지만 대원군의 개혁은 ‘왕권 강화’를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대원군은 외척의 발호를 염려해 부인 민씨의 친정에서 며느리를 뽑았다. 그러나 대원군에 의해 왕비가 된 명성황후 민씨는 화서 이항로의 수제자인 면암 최익현으로 하여금 대원군의 10년 치세를 실정의 연속이라고 공격하는 상소문을 올리게 해 대원군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로써 재위 10년(1873년) 11월, 드디어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고종은 보통 아버지 대원군의 도포자락과 명성황후의 치맛자락에 싸여있다 나라를 빼앗긴 용렬한 군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 그렇게 용렬한 군주는 아니었다. 고종을 직접 만났던 거의 모든 외국인은 그를 대단히 해박한 지식과 보폭 넓은 정치력을 지닌 군주로 회상했다. 그러나 고종의 정치력은 적극적으로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력이 조성한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수동적인 정치력이란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자본주의의 물결이 밀려오던 조선 후기의 혼란기에 이러한 고종의 정치 태도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고종 12년(1875년) 9월에 있었던 일본 군함 운양호의 강화도 침입 사건은, 앞으로 밀려올 외세에 대한 그의 외교 능력을 가늠하는 시금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은 일단 운양호를 격퇴한 후 대등한 위치에서 주체적으로 개국을 단행해야 했다. 그러나 부산 등 3개 항구의 개방과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내용의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약)을 맺음으로써 순응의 길을 택했다. 이후 미국과는 ‘조미통상수호조약’, 청과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맺었으며, 영국 및 독일 그리고 러시아와도 예외 없이 불평등조약을 맺게 되었다. 고종은 이를 소중화 사상에 입각한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이제이는 오랑캐를 제압할 힘이 있을 때 가능한 정책이다.

 

국내의 혼란관 일본의 내정간섭 : 대원군은 고종 19년(1882년) 신식군대인 별기군의 특별 대우에 분노한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임오군란으로 10년 만에 다시 집권하게 되었으나 재집권은 그리 길지 못했다. 명성황후의 책동으로 청나라 군사가 출동하고 대원군은 톈진으로 납치되어 갔기 때문이다. 친청 사대파로 변신한 민씨 일파가 조정을 장악하자, 일본은 친일 정권을 수립하고자 개화파를 이용해 고종 21년(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하였다. 청ㆍ일 양군의 조선 철수와 향후 조선 파병 시 서로 통고할 것은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이 톈진조약으로, 일본은 유사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게 되었다. 고종 31년(1894년)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톈진조약에 의거해 일본군과 청군의 충돌을 부른 계기가 되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대원군을 다시 영입해 친일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일본보다 강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러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번에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다시 대원군을 쫓아낸 셈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도 그 열매를 러시아에게 빼앗긴 일본은 1895년 10월 명성황후를 참살한 후, 그 시신을 소나무 숲 속에 옮겨 불태워버리게 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을미사변이다. 고종은 모든 실권을 일본과 친일 내각이 갖고 있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한 지 1년 만이 1897년, 지금의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그해 10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연호를 광무로 정하면서 황제로 등극했다. 한편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지 않으면 한반도 병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본은, 1904년 2월 선전포고 없이 인천과 여순의 러시아 함대를 급습하여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1905년 9월의 포츠머스강화조약에서 러시아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도ㆍ보호ㆍ감독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였는데, 이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수중에 들어갔음을 뜻했다.

 

고종은 재위 42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2차 한일협약)이 고종의 서명 날인 없이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 등 을사오적의 찬성만으로 강제 조인되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장악한다는 내용의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대표하는 최초의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하게 되었다. 외교권이 없는 나라가 정상적인 독립국가일 수는 없으므로 대한제국은 사실상 이때 망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고종과 일본의 싸움을 본격화된다. 그러나 고종은 을사조약을 폐기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무력보다는 외국, 특히 미국의 중재에 의해 해결하려는 뚜렷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에 고종의 밀사가 나타나자 일본은 한순간 당황했으나 곧 이 사건을 이용해 고종을 몰아내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토와 이완용은 경운궁 중화전에서 황제 양위식을 강행했다. 양위하는 고종과 양위받는 순종 모두 참석하지 않은 채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희한한 양위식이었다.

 

1910년 8월, “동양의 평화를 영원히 확보하기 위해 대한제국을 일본 제국에 합병함이 가장 좋은 길임을 확신”한다는 내용의 소위 한일합방조약이 일본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사이에서 체결되었다. 고종은 물론 순종도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일본에겐 이미 이들의 동의가 필요없었다. 일본은 대한제국이란 국호를 다시 조선으로 회귀시키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해 데라우치 통감을 조선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이제 대한제국의 모든 권력은 고종이나 순종의 것이 아니라 총독의 것이었고, 그가 사실상 대한제국의 국왕이었다. 대한제국을 강제로 침탈한 후 일본은 고종 황제를 이왕(李王)으로, 황태자 순종을 세자로 격하시켰다. 비록 왕이란 칭호는 남아 있었으나 이름뿐이었고, 1871년 3부 72현으로 재편된 일본의 지방 관제에 조선이란 한 부(府)가 추가된 형국이었다.

 

마지막 군주의 최후 : 고종의 망명 계획은 성사되지 못했다. 당사자인 고종이 예기치 못하게 급서한 것이다. 당시 고종의 망명을 준비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망명 정보가 누설되어 일본이 독살한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일제가 편찬한《순종실록》부록에 태왕(太王: 고종)의 와병 기록이 나오는 것은 1919년 1월 20일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고종의 병명도 없다. 그리고 다음날 묘시(오전 6시)에 고종은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그러나《고종실록》의 기록대로 21일에 사망했는지도 불분명하다. 더구나 일본은 고종의 사망 사실을 하루 동안 숨겼다가 발표했는데, 고종의 병명은 급서의 경우 흔히 갖다 붙이는 뇌일혈이었다. 고종의 사망 사실을 은폐하는 동안 일제가 무슨 일을 꾸몄는지 알 수 없다. 고종 독살설은 단순한 설이 아니라 고종의 마지막 임종을 지켜본 일본으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은 친일파 이완용과 이기용 그리고 독살의 혐의를 받고 있는 이왕직 장시국장이자 남작 지위를 받은 한창수, 왕실 사돈 윤덕영, 한상학, 어의 한상호 등의 이름이 실명으로 거론될 만큼 구체성을 띠고 있다.

 

고종의 급서는 한일합방 이상의 충격을 주었다. 만약 고종의 해외 망명이 성공하여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면 자발적으로 합병했다는 일본 주장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차원을 넘어 최소한 영국, 독일, 스페인 같은 군주 국가들의 승인을 받았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완전히 새로운 정세를 조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종의 치세는 결코 훌륭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조선 백성의 임금이었다. 명성황후 민씨가 살해됨으로써 을미의병이 일어나고, 고종의 독살로 3ㆍ1 운동이 발발했으나 518년간 존속했던 조선의 마지막 군주의 인산을 애도 시위로 보낸 것은 500년 왕업에 대한 이 땅 소박한 백성들의 마지막 의리와 예우인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Man
:
BLOG main image
우리 모두 함께 나누는 세상을 만들어 가요~ 함께하는 세상, 함께 나누는세상 엔라이프 포유 by Man

카테고리

함께 나누는 세상 (336)
세상엿보기 (73)
역사와 사람들 (29)
지리와 지명 (1)
게임정보 (0)
맛과 풍경 (23)
유용한정보 (142)
컴퓨터정보 (68)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Total :
Today :
Yesterda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