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는 흔히 무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16세에 문과에  급제한 문관 출신이다. 그
의 6진 개척을 통한 북방  경영이 워낙 대업이기도 하고  생애 중 가장 부각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일종의 선입관이 작용한 셈이다.
  조선 초기까지는 북쪽의 국경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최윤덕의 4군과 김종서의  6진
개척으로 인하여 국경선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현재의 위치로 결정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에 조선의 국력이 조금만 더 신장되었거나  국토 확장 의지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고구려나 발해의 고토를 얼마라도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  때문에 더욱 아쉬운 대
목이기도 하다.
  아무튼 김종서가 문신이면서도 군사적 과업을 맡아서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당
시의 시대 분위기가 아직까지는  문무반의 구별이 심하지 않았던  열린 시대이기도 하였고,
도총제 출신인 아버지에게서 무인으로서의 자질을 물려받은  탓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김
종서 자신이 뛰어난 지략가이자 한번 결정한 일은 끝까지 달성하는 성향의 소유자였기 때문
이다.
  이러한 김종서에 대하여 세종도 "내가 임금이기는 하지만 김종서가 없었다면  6진을 성공
적으로 개척할 수 없었고 또 김종서가 있더라도 내가 아니면 그 일을 추진할  수 없었다"라
고 하며 전폭적으로 신임하였다.
  그러나 훗날 원칙을 지키려는 그의 강직성이  권력 장악 의지가 강한 수양대군과  대립적
위치에 서게 만들었고 결국 반대파에 의하여 비명의 죽임을 당하였다.
 
    강직하고 성실한 공직 생활
  김종서는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  2년(1390년)에 전남 순천에서 도총제로  있던 김추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순천으로 자는 절재이고 호는 국경이라 하였다.
  그의 유년이나 청년 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지만, 어려서부터 성격이 강직
하고 주관과 소신이 뚜렷하여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대호라는 별명도 북방 경영과 연관되어 붙여진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성정상의 단면을 잘
나타내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잘못된 행동이나 성실하지 못한  태도는 용납하지 않는 강직성과 함께  자기의
잘못은 감추지 않고 반성하여 고치려는 소박한 일면도 있었다.
  6진 개척 후 형조판서로 중앙 정계에 복귀한 후 너무도 당당한 그의 태도가 큰공을  세운
자의 오만함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는 명재상 황희의 질책을 그 자리에서 겸손히 수용하였다
는 일화는 김종서, 황희 두 사람의 인간 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좋은 면도 적극  인정하는 대인다운 호방함을 보여서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개인적인 이해나 처신에 능한 신숙주에 대하여도 북방 경영 시절 같이 근무한 것을
계기로 알게 된 재주와 학문적 능력을 높이 사서 항상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수양대군에 동조하여 김종서의 반대 입장에 서게 되었던 신숙주도 이때까지는 김종서와  좋
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김종서의 관직 생활은 16살인 태종5년(1405년)에 문과에 급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는 이때부터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북방 경영의  길을 떠났던 세종15년(1433년)까지 대
과 없이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로서는 청,장년 시절 30년 가까이 무난한 관직 생활을 하며 기반을 닦은 셈인데, 김종서
가 관료로서 성장하던 시기는 태종대와 세종대 전반부여서 전자의 시기는 아직 공신 세력이
득세하고 있기도 하였지만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큰 직책은 맡지 못하였고, 후자의 시기에
와서야 조금씩 주요 관직에 등용될 수 있었다. 즉,  세종 원년(1419년)에 사간원 우정언으로
임명된 후 지평, 집의, 우부대언 등을 지냈다.
  세종대에는 자연적인 관료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있기도 하고 많은 국가적  사업들이
추진되고 있어서 새로운 인재들이 상당히 필요했기   때문에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힘입어
김종서도 서서히 관계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러나 함길도 관찰사로서 국경 개척이라는 임무를 맡아 파견되기까지 묵묵히 무명  공직
자로서 20여 년을 보낸 것을 보면 그가 세상의 이해 관계에 야합하거나 명리를 탐하지 않은
꾸준하고 착실한 관료였음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함길도 관찰사 직책도  대업을 지시받고 북방의 지방관으로  나간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외직으로의 발려이었고 그 임무 또한 성공 여부가 불투명한 난제였기  때문에 반드
시 출세의 발판이 된다는 보장도 없는 어려운 자리였으나, 그는 보란 듯이 임무를 완수하고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리고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받았을  때 김종서의 나이가 45살이었는데,  30여 년 가까이
공직생활을 해왔다지만 그 나이에 도백이면 그때나 지금이나 늦은 출세라고 할 수는 없다.
 
    국경지역 사령관으로 부임
  고려 말기에 길주 만호부가 설치되어 국경선이 대개 그 부근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만주
족들의 침입과 행패가 심해 변방은 한시도 편한 날이 없었다.
  그때 두만강과 압록강에 출몰하던 이 이민족을 야인이라고 불렀는데 흔히 여진족으로  알
려진 이 무리들은 만주지방에 뿌리를 둔 부복으로서 고려 때는 그 세력이 강성하여 금이라
는 나라를 세운 적도 있고 후에 명을 멸망시키고 청을 건국하였다.
  그들은 당시 만주 남부지역에 자리잡고 끊임없이 조선의 북쪽 국경지역을 침입하였다. 그
들 입장에서는 거주지역이 척박한 땅이었으므로 곤궁기에 생존을 위하여 중국의 동남부지역
과 조선의 북부지역에 단속적으로 나타나서 약탈을 감행했던 것이다.
  고려조 이래 교역을 통해 회유하기도 하고 무력으로 정벌하기도 하였지만 이들과의  분쟁
은 끝이 없었고, 이즈음에는 아예  영변 이북의 땅에 조선의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은 세종대에 국내 정치가 안정되자 국토 침탈 상태에  이른 북방에 주목하게 되었다.
사실 이 지역은 조선의 입장에서는 이성계가 일어난 땅이었으므로 국가적 위신상으로도  마
냥 방치할 수는 없었다.
  당시 조선의 최북단 방어진지는 태조 때 정도전이  공주(경흥 남쪽지역)에 설치한 경원부
로서 세종 9년(1409년)에 경성으로 이동해 있었다. 그런데 이곳이 여진족의 계속적인 침입으
로 방어가 힘들어지자 다시 용성(지금의 수성) 지역으로  후퇴시키자는 의견이 나올 지경이
었다. 그러나 세종은 오히려 영토 개척 의지를 더욱 강화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즉, 세종 14년(1432년) 6월에 경원부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영북진을 여진족 주 출몰지
인 석막(부령)에 추가 설치하여 방어 목표 지역을 확장시키도록 한 것이다.
  이 영북진 설치야말로 북쪽으로 향한 세종의 영토확장 의지를 잘 나타내주는  정책으로서
그 후로 기회만 있으면 한 걸음이라도 북쪽으로 더 나아가서 고토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그러던 세종 15년(1433년)에 여진족 부족간의 내분이 발생했다는  정보가 조선 조정에 날
아들었다.
  경원부 지역을 괴롭히던 우디거 부족과 회령지역에 거주하던 오도리 부족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여 그 세력들이 많이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으로서는 그토록 기다리던 기회가 마
침내 찾아온 것이다.
  조선 조정은 이때를 북방 개척을 위한 결정적 호기로 인식하고 드디어 그 적임자로서 김
종서를 임명하여 국토 회복 작업을 지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세종 15년(1433년)에 함길도 관찰사로 부임한 김종서는 우선 흩어진 그 지
역 민심을 추슬르는 작업부터 시작하였으며, 또한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대우도 최고 수
준으로 개선시켰다.
  군졸들의 사기를 진작하고 노고를 치하할 목적으로 큰 잔치를  자주 열기도 하였는데, 그
씀씀이가 너무도 호방하고 커서 관찰사가 인심을 얻기위해 국가 재정을 심하게  탕진한다는
걱정과 비난이 생기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김종서는 이러한 오해에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이곳의 군사들은 국경을 사수하
기 위해 집을 떠나 있은 지 오래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고생하는 이들을 후하게 대
접하고 위로하지 않는다면 누가 목숨 걸고 오랑캐를 막아내려 할 것인가? 지금은 이들에게
소를 잡아 대접하지만 국경이 정비된 후에는 닭을 잡아도 충분할  것이다."라고 갈파하였다.
그만큼 그는 지역 민심과 군사들의 어려움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있었고, 무슨 일이든 뚜렷
한 목적 아래 행하였던 것이다.
  또 당시 그 지역은  영토 확장의 실질적  효과를 얻기 위하여  함길도 남부 지방의 빈농
2200호를 경원부와 영북진에 이주시켰는데  김종서는 이들에게 세금을  감면해주고, 이주민
정착에 좋은 성과를 보이는 향리들에게는 중앙 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터주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이주민 안정책을 추진하였다.
  이후로 이 지역에는 삼남지역에서까지 이주 지원자를 받는 등 수차례에 걸쳐 이주 정책이
진행되었는데, 김종서의 예에 따라 이주민들을 효율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하여 천일을 양인
으로 승격시키고, 양인은 토관직을 수여하고, 향리들에게는 그 역을 면해 주기도 하였다.
  김종서는 국경지역의 지방관으로서 이러한 적극적인 지역 안정책을 진행하면서 군사 조련
도 강화하였고, 일사불란함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위엄 있고  엄격한 자세로 군사들을 통솔
하였다.
  천성적인 강직함에다 무인의 피를 이어받은 대담성이 있었던 그이기는 하지만 위험한  국
경지역의 군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는 지휘관으로서 강한 신념과 자세를 의식적으
로 보여줄 필요도 있었다.
  이러한 국경지역 군사 책임자로서 지키려고 했던 그의  자세를 잘 알 수 있는 일화가 있
다.
  어느 날 군사들을 위해 밤이 늦도록 큰잔치를 베풀고 있던 자리에서 김종서 앞으로 느닷
없이 화살이 날아와 술통을 깨뜨려 버렸다. 진중은 급작스런  사건으로 혼란에 빠졌지만 김
종서만은 그 자리에서 꼼짝않고 술을 계속 마시고 있었다. 화살을 쏜 자를 붙잡지는 못했지
만 더 이상 별다른 상황이  진행되지 않자 소동은 곧 잠잠해졌는데,  김종서의 너무도 태연
자약한 태도가 사람들의 경이로움을 사게 되었다.
  그에 대하여 김종서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나를 시험해  보려는 자의 농간이거나 야만족들의 소행이  분명한
데, 이렇게 든든한 우리 군사들이 모여 있는 마당에 더 이상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더구나
장수인 내가 우왕좌왕한다면 어떻게 군사들이 나를 믿고 따르겠는가?"
 
    본격적인 6진 개척 활동
  이렇게 지역 민심을 안정시키고 군사들의 통솔을 위한 기반도 확실히 닦게 되자, 그는 허
술했던 국경지역의 방비를 튼튼히 구축한는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비교적 남단인 석막에 있던 영북진을 경원부 북쪽의 백안수소(현 행영)로 옮겨
종성군으로 정하여 북방 경영의 의지를 더욱 확고히 하였다.  이것은 영북진이 실질적인 최
북단 방어기지로 전진되고 주변 개척의 전초기지로  결정되었으며. 동북부 지역의 여진족이
완전 소탕되거나 추방 또는 회유되어 지역적으로 안정되었음을 의미하였다.
  이렇게 허약하던 최북단 방어진지인 공주(경흥)지역을 안정시키고  동북쪽 방어지역을 북
상시킨 후, 김종서가 다음으로 주목한 곳은 알목하(회령지역) 근처의 농토였다.
  알목하 지방은 강을 끼고 있어서 비교적 비옥했기  때문에 여진족의 침입이 잦은 지역이
었다. 또 그 전해에 이  지역에 주로 거주하던 여진족인 오도리족은  우디거 부족의 공격을
받아 추장 부자가 살해되어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김종서는 이곳의 전략적,경제적 가치를 간파하고 집중 공략하여 결국 북쪽지역의 최대 농
업지역을 수복하고 이곳에 회령진을 설치하였다. 그 해 겨울에는 이곳을 도호부로 승격시켜
방어진지로서 그 중요성을 더욱 강화하고 농민을 이주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여 완벽하
게 조선의 영토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영북진의 북상으로 군사적 후방이 된 경원부도 더 북쪽인 회질가(현 경원)로 이동
시키고 구 경원부 주둔지인 공주지역에는 절제사 휘하에 200명의 방위군을 배치한 후 300호
정도의 농민을 이주시켜 공성현을 설치하였다. 공성현은 세종 19년(1437년)에 경흥읍으로 격
상되었다가 세종 25년에는 다시 성을 확장하고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결국 서쪽의 회령에서부터 종성, 경원을 거쳐 경흥에 이르기까지 동북면의 국경을 확정하
고 지역을 완전히 평정한 것이다.
  그리고 세종 22년(1440년)에는 종성군을 백안수소에서 수주(현 종성)로 더 서진시켜 회령
부와의 방어 간격을 좁히고 종성군과 경원부 사이에는 다온평에 진을 설치하여  온성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근 7년 동안 북쪽의 국경지역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한 김종서는 세종22년(1440년)
에 형조판서를 제수받아 중앙 정계로 복귀하게 된다.
  그 후 세종 25년(1443년)에 종성과 온성 두 곳을 모두 도호부로 격상시킨 후 그 다음해에
훈융(경원 북쪽 강가)에서 연대(회령 서쪽지역)까지 강을  따라 길게 성을 축조하여 북방경
계를 완전히 정비하고 국경 수비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세종 31년(1449년)에 영북진의 옛터인 석막에 부령부를  설치하여 6진을 완성하였
다.  즉, 경흥, 경원, 온성, 종성, 회령, 부령이 그것인데  오늘날까지도 그 지명이 그대로 유
지되고 있으며, 신라 통일 이후  국권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던 그  지역을 완전히 평정하고
현재의 국경선을 확정짓는 대업을 마무리지은 것이다.
  사실 세종대의 이러한 북방 개척은 영토를 확장하는 의미뿐 아니라 국가 경영상 민본 정
책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즉, 농토를  잃거나 소유하지 못한 농민들을 회복한  북방지역으로
이주시켜서 새로운 생활 터전을 만들어 주고  국가적으로는 인구의 분산과 균형 있는  국토
개발을 통하여 국력을 증대시킨다는 복합적인 목적이 있었다.
 
    고려사 편찬을 주도하다.
  형조판서로 중앙 정계에 복귀한 김종서는 예조판서, 우참찬을 역임하다가 세종 32년(1450
년)에는 좌찬성으로 평안도 도제찰사를 겸직하기도 하였다.  김종서는 그 다음해인 문종 원
년(1451년)에는 우의정을 제수받아 그의 나이 61세에 드디어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문종이 사망할 때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정분과  함께 고명대신으로 문종의 유명
을 받들어 단종을 적극 보위하다가 계유년의 참사를 당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김종서는 그의 중요한 업적  중에 하나인 고려사 개수작업을 수행하였는데  이
과정과 결과가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실제 사실을 추적해 보자.
  원래 고려사는 조선 개국 후 3개월 만에 정도전과 조준 등이 편찬 작업에 착수하여  태조
4년(1395년) 4월에 총 27권으로 처음 완간되었다. 그런데 이 고려사는 조선 건국을 미화하기
위하여 사실이 상당히 왜곡되었고 편찬자의 개인 감정과 이해 관계까지 게재되어  실록으로
가치를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즉, 고려는 자주성이 강하여 자체적인 조,종 등의 묘호와 존칭을 사용하였는데도 몽고  침
입 이후의 상태에 억지로 전 시대를 끼워 맞춰서  의도적으로 격하시켰으며, 고려 충신들인
정몽주, 김진양 등은 깎아 내리고 별다른 공도 없는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은 청백리로 칭
송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세종은 정도전의 고려사를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고까지 말하여 그 잘못을 지적
하고, 세종 6년(1424년)에 유관, 윤회 등에게 명하여 사실과  다른 부문을 바르게 고쳐 쓰도
록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쓴 고려사도 사실 관계는 복원되었으나,  연대별로 너무 간단히 요약
되어서 그 내용이 충실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부득이 세종 14년(1432년)에 감춘추관사 신
개, 지춘추관사 권제, 동지춘추관사 안지 등에 의하여 보완 개수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런데 이 개수 고려사는 예전 것에 비해 훨씬 상세하게 기록되기는 했으나 또다시 사실
과 다른 내용이 발견되었다. 예를 들면 권제가 자기의 조상인 권근이나 권수중의 좋지 못한
점을 빼거나 고쳐 썼던 것이다. 이에 따라  세종 31년(1449년)에 반포를 중지하고 3차 개수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때 실록 편찬을 관장하는 지춘추관사는 공석이었는데, 전임자였던 안지가 2차 고려사를
개수할 때 바르게 처리하지 못했다 하여 파면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제대로 된 실록을 편찬하려면 총책임자가 강직하고 사심이 없어야 한다는 판단 아래
우찬성으로 있던 김종서를 지춘추관사에 임명하였다.
  이 편찬 작업에 동참한 인물들은 이조판서 정인지, 호조참판 이선제, 집현전 부제학  정창
손 등과 박팽년, 하위지, 유성원, 양성지, 최항, 허후, 신석조, 어효당,  김희손 등의 사관들이
었다.
  3차 개수 고려사는 이전 것들과는 달리 기전체로 작성되었으며 문종 원년(1451년) 8월 25
일에 총 139권으로 완성되었다.
  작업에 착수한 지 2년 7개월 만에 완료한 이 고려사가 오늘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그것
으로 흔히 정인지의 고려사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김종서가 지춘추관사로 있으면서 총책임을 지고 편찬하였는데 왜 정인지의
고려사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이 실록을 편찬한 지 2년  후에 계유정난이 발생하고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후
자신에게 대항했던 인물들을 수사관에서 모두 빼버렸기 때문이다.
  역사의 승자들이 실제 사실을 왜곡시켜 버린 또 하나의 사례를 고려사 편찬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천추의 한을 남기고
  그러면 이제 단종의 비극을 불러온 계유정난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자.
  조선 5대 임금인 문종은 병약하여 왕위에 오른 지 2년 3개월 만에 불과 39살의 나이로 세
상을 등지게 되자 12살밖에 안 된 어린 외아들이 보위에 오르게 되니 이 사람이 바로  비운
의 왕 단종이다.
  이때 김종서는 우의정으로 있다가 단종 즉위 후 좌의정으로  승차되어 있었다. 당시는 세
종대에 이미 의정부 서사제로 환원되어 있기도 했지만 병약한 선왕 문종과 어린 임금 단종
의 재위로 정사는 대부분 의정부의 재상들이 전담해서 처리하였다.
  어차피 조선의 정치체제는 다소 굴곡이 있었지만 재상 중심 관료체제로 구상되어  출발했
기  때문에 일응 정상 상태로의 복귀처럼 보이지만 자칫 그 운영 상태에 따라서는 왕의 존
재가 유명무실해질 우려도 있었다.
  따라서 태종이나 세조와 같이 강골 성향과 권력 욕구가 강한 군왕은 왕권을 강화하려 하
였고, 배경과 힘이 약한 왕들은 어쩔 수 없이 신하들의 결정에 이끌려 갈 수밖에 없었던 것
이 조선의 정치구조였다.
  당시에도 의정부 서사제의 복귀아래 병약하고 어린 임금이 연이어 보위에 올라 자연히 재
상들과 힘있는 관료들의 발언권이 강해져 있었다. 그 당시  상황은 황표정사 제도로 극명히
알 수 있다.
  즉, 조정의 주요 인사 문제에 대하여 대신들이 인사 대상자 명단에서 발탁 예정자에게 황
색점을 찍어서 올리면 왕은 단지 승인하여 주는 형식적 절차만을 거쳐 결정하는 제도가 그
것이다.
  결국 단종 초기에는 문종의 유명을 받은 고명대신인 황보인과 김종서 등 노재상들에게 권
력이 집중되었다.
  따라서 왕실 세력들은 당연히 불만일 수밖에 없었고, 신진  관료들도 일부 대신들에 대한
권력 집중을 달가워하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로 계유정난  당시에는 집현전 학사 출신들이
나 중간 관료들의 대부분이 중립적 자세를 보이거나 동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어린 임금의 뒤에는 장성한 숙부만도 10명이 넘게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수양대군
은 야망이 크고 수완도 뛰어난 인물로서 자신에게도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암암리에 권
력 탈취를 모색하고 있었다.
  결국 김종서를 제거하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수양대군이 한명회와  권람
등 모사가들과 모의를 한 끝에 단종 원년(1453년) 10월 10일에  거사를 일으킨 것이 계유정
난이다. 
  정난 주도 세력들은 일단 김종서를 유인하여 죽이기로 계획하고 김종서의 의심을 사지 않
기 위해 수양대군이 직접 임운이라는 하인 한 명만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향하고 그 뒤
를 양정, 유수, 홍달순 등의 장사패가 매복하여 따르기로 하였다.
  수양대군의 급작스러운 밤중 방문에 평소 그를 의심하고는 있었지만 자기 집 앞에서 무슨
일이 있으랴 싶어 무방비로 영접하던 김종서를 수양은 철퇴로  살해하고, 왕명을 빌려 대신
들을 소집한 후에 반대파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니 이것이 정난의 전 과정이다.
  그런데 불의의 습격을 받은 김종서가 아직 죽지 않고 있다가 대궐로 들어가 사실을 알리
고 도움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모든 성문은 수양대군의  부하들에게 장악되어 있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김종서는 부상당한 몸으로 아들 집에 숨어 있다가 다음날 새벽에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안 수양대군이 보낸 이흥상에 의하여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김종서는 대역모반죄라는 누명까지 뒤집어쓰고 효수되었으며, 그의 일족들도 모두 죽임을
당해 멸문의 화를 입게 되었다.
  그의 묘가 공주 근처 무성산 부근에 있었다고  하지만 이 또한 확실치 않으며 지금은 그
무덤조차 찾을 수가 없다.
  김종서가 죽은 후 정권은 완전히 수양대군이 장악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조카를
위협하여 양위 형식으로 왕위를 넘겨받으니 이 사람이 조선 7대 임금인 세조다.
  김종서가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단종 즉위  후 정사를 처리하면서 독단을 한다는  오해도
받았으나 그의 평소 강직한 태도에 비추어볼 때 자신이 권력을 향유하려 하였다기보다 어린
왕을 보좌하여 흔들림 없이 국사를 운영하고자 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권력이란 예측할 수 없는 칼끝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오히
려 칼날을 들이대는 속성이 있는 것인지 강력한 권력자인 김종서에게 오히려 죽음을 가져다
주었다.
  그의 죽음은 그가 강력한 권한 행사로 오해와 불만을 사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수양대군
의 왕위 찬탈 계획에 최고의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외지로 나가면 장수요, 중앙에 들어와서는  재상이었던 강직한 인물 김종서. 그는  말년에
위약한 왕을 만나 이를 잘 보위하려다 오히려 죽임을 당한 불행한 인물이었다.
  제승 방략이라는 군사 지휘를 위한 저서를 남기기도 한 그는 영조 22년(1746년)에야 복관
되어 충절의 이름을 후세에 전하고 있으나, 그로서는 수양대군을  먼저 제압하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후세의 입장에서는 김종서가 남긴 시조 2수를 통해 그의 강인한 인물됨을 되짚어 보며 그
의 통한에 가슴 아파할 뿐이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차갑지만
만리변성에 일장검을 짚고 서니
긴 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구나.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을 씻겨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대장부냐
어찌타 나라에 큰공을 누가 먼저 세우리요.

Posted by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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