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고려 태조(太祖) 왕건의 손녀로 제5대 경종(景宗)의 비(妃)이며, 제7대 목종(穆宗)의 생모이다. 목종이 즉위한 뒤에 천추태후(千秋太后)로 불리며 전권을 행사했으나, 강조(康兆)의 정변으로 권력을 빼앗기고 유배되었다.

별칭
천추태후(千秋太后)

시호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

국적
고려

활동분야
정치

본문

고려 태조(太祖, 재위 918∼943) 왕건(王建)의 일곱째 아들인 왕욱[王旭, ? ~ 969, 성종이 즉위한 뒤에 대종(戴宗)으로 추존]의 딸이며, 고려의 제6대 왕인 성종(成宗, 재위 981~997)의 친누이이다. 아버지인 왕욱과 어머니 선의태후(宣義太后) 유씨(柳氏)가 모두 일찍 죽어, 할머니인 신정왕후(神靜王后) 황보씨(皇甫氏)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그래서 동생인 헌정왕후(獻貞王后, ?~992)와 함께 황보씨(皇甫氏)의 성(姓)을 사용하였다. 황보씨는 황주(黃州)의 유력 호족(豪族)으로 신정왕후의 딸인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도 태조의 넷째 아들인 제4대 광종(光宗, 재위 949~975)의 비(妃)가 되어 제5대 경종(景宗, 재위 975∼981)을 낳아 외척(外戚)으로 대를 이어 권세를 누렸다. 그리고 광종이 호족의 군사적·재정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왕권 강화를 도모하기 위해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등 중앙집권적 개혁 정책을 추진하자, 대목왕후를 앞세워 이에 반대하기도 했다. 
헌애왕후는 동생인 헌정왕후와 함께 고종사촌인 경종(景宗)과 혼인하였는데, 경종이 즉위한 뒤인 980년 아들인 송(誦, 訟이라고도 함)을 낳았다. 하지만 981년 경종이 즉위 6년만에 죽자, 겨우 2살밖에 되지 않은 송(誦)을 대신해 헌애왕후의 친오빠인 왕치(王治)가 광종의 사위로서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그가 고려의 6대 왕인 성종(成宗, 재위 981~997)이다. 성종은 광종(光宗)을 계승하여 중앙 관제를 정비하고, 과거제도를 강화하고 지방 호족을 향리(鄕吏)로 편입해 통제하는 등 중앙집권적 개혁 정치를 전개하였다. 이 무렵 헌애왕후는 외가의 친척인 김치양(金致陽)과 정을 통하였는데, 이 사실이 알려져 분란이 생기자 성종은 김치양에게 장형(杖刑)을 내린 뒤 멀리 유배를 보냈다. 
997년 성종이 죽자, 헌애왕후의 아들인 송(誦)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그가 고려의 7대 왕인 목종(穆宗, 재위 997~1009)이다. 목종이 즉위한 뒤에 헌애왕후는 천추전(千秋殿)에 거처한다고 해서 천추태후(千秋太后)라고 불렸으며, 섭정(攝政)을 하며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헌애왕후는 유배되었던 김치양(金致陽, ?~1009)을 불러들여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우복야(右僕射) 겸 삼사사(三司事) 등의 지위에 앉히며 중용(重用)하였다. 그리고 황보씨(皇甫氏)의 본거지인 서경(西京)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김치양의 출신지인 서흥(瑞興)에 성수사(星宿寺)를 세우는 등 곳곳에 도관과 사원을 건립하였다.
1003년(목종 6년), 헌애왕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에게 목종(穆宗)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시키려 하였다. 그래서 헌정왕후가 태조(太祖)의 아들인 왕욱[王郁, ? ~ 996, 뒤에 안종(安宗)으로 추존]과의 사이에서 낳은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 991~1031)을 죽이려 하였다. 헌애왕후와 김치양은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을 숭교사(崇敎寺)에 보내 승려로 만들었으며, 1006년(목종 9년)에는 그를 남경(南京)의 신혈사(神穴寺)로 보냈고, 여러 차례 자객의 보내 살해하려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헌애왕후와 김치양에 반대하는 세력은 1009년(목종 12년)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을 새로 왕으로 옹립하였다. 1009년 정월 천추전에 불이 났는데, 서북면(西北面) 도순검사(都巡檢使) 강조(康兆, ?~1010)는 김치양이 난을 일으켜 왕위를 빼앗으려 한다며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진입하여 김치양과 그 아들 등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을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그가 고려의 제8대 왕인 현종(顯宗, 재위 1009~1031)이다. 헌애왕후는 유배되었다가 뒤에 황주(黃州)로 옮겨가 머물렀다. 그러다 1029년(현종 20년) 왕궁으로 돌아와 숭덕궁(崇德宮)에서 죽었다. 시호(諡號)는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 능호(陵號)는 유릉(幽陵)이라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등의 사서(史書)에서는 헌애왕후를 김치양과 사통(私通)하여 왕실과 나라를 어지럽힌 음탕한 여인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이는 당대의 관습을 무시하고 조선의 성리학적 사관(史觀)에 기초해 이루어진 왜곡된 평가라는 비판이 일반적이다. 최근에는 팔관회연등회를 폐지하는 등 유학(儒學)의 정치이념을 강조했던 성종(成宗)에 맞서 전통사상을 강조하고 서경을 중시하는 등 북진정책을 수호하려 했던 여걸(女傑)로 재평가하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유학(儒學)은 사대주의, 전통사상은 자주적 민족주의'라는 지나치게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계의 비판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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