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 기마군단의 불패신화를 무너뜨린 고려군

1. 고요전쟁(高遼戰爭) 1차전(기원 993년)

전쟁에서는 물리적인 면만큼이나 심리적인 면이 중요하다. 수만 기로 구성된 기마군단의 박력있는 돌격과 하늘을 메우는 화살의 소나기, 한 차례의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쌍방간의 시체들로 뒤덮이게 되는 전장터의 모습들.....이런 식으로 묘사할 수 있는 기동력을 특기로 하는 거란군은 당시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 최고 수준의 전투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거란군이 중국의 송나라를 상대로 올린 성과는 일차적으로 그들 자신에 의해서 실제 이상으로 과장되고, 이것은 다시 전하는 사람에 의해 이차적으로 더욱 과장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가, 다른 나라들로 하여금 막연한 공포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또한 거란인들로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그러나 거란의 바로 턱 밑에 있는 고려는 그들의 기대를 철저히 저버렸다. 고려는 태조 왕건이래 거란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동족의 왕조라고 할 수 있는 발해를 기습해 무너뜨렸다는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였다. 또한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한 고려 왕조로서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수복해야 하는 의무감을 갖고 있었다. 문제는 고구려의 옛 영토가 바로 거란인들의 영토와 겹치는 데 있었다. 유능한 장군 출신으로 거란의 군대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던 태조 왕건은 고려의 창건이래 북진정책을 고려의 기조로 삼아 서경을 중시하고, 후계자들에게 일 년에 100일 이상은 서경에 머물 것을 유언으로 남겨, 고려의 북벌 의지를 확실하게 밝혔다. 아시아 최강국으로 성장한 거란과, 삼국을 통일한 여세를 몰아 북으로 진출하려고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고려 사이에 일어날 무력충돌은 단지 시간문제였을 뿐 양국이 실제로 교전하기 전부터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거란과 송의 투쟁이 극한으로 치닫던 서기 993년에 이르러 고려도 거란과 격돌하게 되었다. 당시 고려는 지금의 평안도 북쪽의 여진에 대하여 거센 공격을 개시함으로 해서양국 간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게 되었으나 그때는 이미 고려와 거란과는 오래 전에 국교가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 있었다. 거란은 여진족 중 그들의 영토 안에 있던 부족들은 보호하고, 영토 밖에 있던 부족들은 배척하는 이중적인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이에 고려는 자기들이 거란의 영토 밖에 있던 여진족들을 공격한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고려의 여진족에 대한 군사행동에 불안을 느낀 거란의 여걸로 섭정의 자리에 있었던 소태후는 같은 집안 출신으로 동경유수(東京留守 : 遼寧)의 직에 있었던 소손녕(蕭遜寧)을 시켜 고려를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거란의 지도부는 고려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그 이유로써 고려군의 주력은 보병이라, 그 전에 보병을 주력으로 삼았던 송나라와 싸워 이긴 경험에 비추어 고려와의 싸움에서는 쉽게 승리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소태후의 명을 받은 소손녕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공격해 왔다(서기 993년).

소손녕이 거느린 거란의 대군은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약 10만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소손녕이 거느린 거란군은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興化鎭)을 함락시키고 계속 남하하면서 많은 수의 고려군을 포로로 잡고 고려의 항복을 요구했다.

당시 고려는 약 4만 5천의 상비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거란군의 침입에 크게 당황한 고려조정과 대신들은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할양하고 강화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고려의 왕 성종(成宗 : 재위 서기 981- 997년)도 역시 땅을 떼어주고 강화를 맺는 것으로 마음이 기우러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전파인 서희(徐熙)와 이지백(李知白)이 " 전쟁의 승패는 병력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의 약점을 알고 미리 움직이는데 있다."라고 성종을 설득해 결국은 고려와 거란은 전면전 일보직전까지 내닫게 되었다. 그러나 소손녕은 거란군의 위세를 보여주기 위해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가 장군 대도수(大道秀 : 고려에 망명해 온 발해의 태자 대광현(大光顯)의 아들)와 유방(庾方)이 지휘하는 고려의 수비군에게 참패하여 일단 거란군의 기세가 꺾였게 되었다. 또한 거란의 실권자인 소태후는 고려를 자극하여 송나라와 대치하고 있던 거란의 배후에 적을 만들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특히 외교관 출신인 서희는 서전의 승리와 더불어 송과의 첨예한 대립 때문에 하루빨리 고려와의 관계를 정상화해야 하는 거란의 다급한 입장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그 기회를 최대로 활용해서,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강동6주의 관할권을 거란에 요구했다. 당시 강동6주의 주인은 거란이나 고려가 아니라, 반농반목(半農半牧) 상태로 흩어져 살고 있던 여진족들이었다. 따라서 고려가 이때 거란으로부터 강동6주를 할양 받았다는 역사의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강동6주의 영유권을 거란으로부터 확인 받은 고려는 그곳에 살고 있던 여진족들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거란의 재침에 대비해서 요새를 구축했다. 이로써 소손녕이 그 군사를 이끌고 본국으로 철수함으로 해서 일촉즉발의 위기감을 감돌았던 양국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강화를 맺고 전면전을 피했다.

2. 고요전쟁(高遼戰爭) 2차전 (서기 1014년)

거란의 군주 성종(聖宗) 야율융서(耶律隆緖)는 그의 모친인 소태후를 닮아 매우 현명한 군주였다. 그가 고려를 친정하게 된 것은 그의 모친이 이룬 위대한 업적에 대한 동경과, 자신도 그와 같은 위업을 이루어야 하겠다는 강박관념에서 였다.
수년간 지속된 거란과 고려의 우호관계에 적신호가 들어오게 된 것은, 일차전과 마찬가지로 여진족들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강동육주의 관할권을 확보한 고려에 의해 압박을 받게 된 여진족들은, 서경도순검사(西京都巡檢使) 즉 평양방어사령관 강조(康兆)가 당시의 고려왕 목종(穆宗)을 폐위시키고 현종(顯宗)을 옹립하자, 그 내막을 자세하게 거란의 황제 야율융서에게 고했다. 그것은 고려가 강동육주를 요쇄화하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거란으로서는 고려를 침공할 좋은 구실이 되었다.

거란의 성종은 서기 1010년 고려에게 실권을 쥐고 있던 강조를 거란으로 압송할 것을 요구했다. 거란의 요구가 당연히 고려에 의해 거절당하자 양국은 다시 교전 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동년 11월 거란의 황제 성종은 친히 4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입했다. 성종의 모친 소태후는 그 전해에 죽었기 때문에 거란의 대신들은 성종의 친정이 불가하다고 간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고려 역시 강조를 총사령관으로 30만의 대군을 출동시켜 거란의 침입에 대항했다.
야율융서는 고려군과의 회전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전략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그는 자신감에 넘친 나머지 일차전 때 소손녕이 안융진(安戎鎭)에서 패한 원인에 대한 전술적인 분석을 게을리 한 것이다. 당?그의 패전에 대해 거란군 측에서는 모두 너무 성급한 나머지 그들이 저지른 실수를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면밀히 분석해 보면, 안융진에서의 패전은 거란군이 가지고 있던 전술적인 약점과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고려군은 고구려 시절부터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강궁인 예맥에서 생산되는 각궁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고려군은 당시 거란이나 그 어떤 민족이 보유하고 있던 활보다 사거리가 길고 관통력이 좋은 강궁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궁수들의 사격 능력도 거란군보다 훨씬 우수했다. 같은 능력을 가진 궁사라 할지라도 말 위에서 쏘는 경우와 두 발로 땅을 굳건하게 디디고 쏘는 경우 그 정확도에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주력무기에서의 우세는 거란군의 월등한 기동력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더욱이 거란군으로서는 고려군이 우세한 각궁을 활용해서 수성전으로 일관할 때 그에 대한 대책을 전혀 마련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전술적인 약점은 40만 대군이 벌린 첫 번째 전투인 흥화진(興化鎭)의 싸움에서 거란군은 성을 공략하기는커녕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활의 유효 사거리에서의 차이가 수십만 거란군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당시 고려군의 방어 능력은 우수한 활과 뛰어난 축성술에 힘입어 당시 아시아에서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란군에 있어서 고려군은 쉽게 공략했던 보병 위주의 송나라 군사들과는 전혀 다른 상대였다. 이 전쟁은 거란의 기마군단이 가지고 있던 당대 최고를 자랑하던 공격력를 의미하는 창과 고려군이 가지고 있던 당대 최고의 방어력을 의미하는 방패가 맞붙은 싸움이 되었다.

이윽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거란의 성종은 고려군 흥화진 방어사령관 양규(楊規)에게 몇 번에 걸쳐 항복을 종용하다 여의치 않자 흥화진의 공략을 포기하고, 강조의 본진이 주둔해 있던 통주(通州)로 진격하려고 했으나 그는 험준한 한반도 북부 산악지대 곳곳이 세워져 있는 수많은 산성에 포진한 고려군을 우려하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은 거란군의 배후를 걱정한 야율융서는 20만의 군사들을 후방의 경계에 돌리고 자신은 나머지 20만의 병력만을 데리고 강조와의 일전을 위해 통주로 진격했다.

고려와 거란 총 50만의 대군이 맞붙은 통주회전에서 야율융서는 전투 초반에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고려군이 신무기를 사용하여 당시까지 천하무적으로 인정받았던 거란의 기마군단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고려군은 검차(檢車)라는 신무기를 고안하여 실전에 투입한 것이다. 커다란 수레 앞에 긴창을 빽빽이 박은 검차를 고려의 보병들이 밀고 나와 거란의 기마군단의 돌격을 저지하면서 거란군의 장기인 종심돌파를 역으로 노렸다. 당시의 모든 야전의 전술은 기동력을 이용한 기마군단이 종심을 돌파하여 적의 배후와 전면에서 적군을 포위섬멸하는 것이 일반적인 양상이었다. 야전에서 고려군이 자신들의 것보다 사정거리가 긴 활로 엄호하면서 검차를 앞세운 보병들을 돌진시키자, 거란군은 얼마동안 고려군에게 반격할 마땅한 수단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이윽고 전투가 여러 날 계속되자 쌍방간에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결국은 버티지 못하고 뒤로 밀려난 쪽은 당시까지 무적신화를 자랑하던 거란군이었다.

그러나 야율융서는 노련한 지휘관이었다. 거란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궁여지책으로 야음을 틈타 고려군의 본영을 기습했다. 특공대의 대장으로 임명된 야율분노(耶律分奴)는 고려군의 본영을 기습하여 고려군 대장 강조를 사로잡는 예상외의 대전과를 올렸다. 고려군은 일순간의 방심으로 본영은 붕궤되고 대장은 적군에게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이 전투에 대해 일부 사가들은 강조가 거란군을 일부러 깊숙이 끌어드려 완전 섬멸을 노리다가 오히려 역습을 받아 본영이 무너지면서 싸움에서 패하고 자신은 적군의 포로가 되었다고 하지만, 아마도 연이은 승전에 취해 경계를 소흘히 했던 것이 주요 패인이었다. 그날 밤의 전투에 대해 고려사에는 ' 강조는 바둑을 두다가 거란군에 포로가 되었다.'라고 우회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통주회전에서 강조의 본대를 격파한 야율융서는 그래도 후방이 걱정되었던지 강조의 필체를 위조해 흥화진(興化鎭)에 보내 항복을 권했으나 양규는 응하지 않았다. 이에 거란군의 본대는 흥화진을 우회하여 곽주(郭州)로 진격했다. 그러자 곽주성의 방어책임자 조성우는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거란군은 힘들이지 않고 곽주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여기서 거란군은 또 하나의 전략적인 실수를 저지름으로 해서 후에 큰 패배를 맛보게 된다. 거란군은 통주회전 이후 그들의 장점인 기동력을 발휘해서 계속 남진했지만, 역으로 고려군의 많은 병력은 전투력을 그대로 유지한 체 거란군의 배후에 남아 있게 되었다. 통주회전에서 패한 고려군은 큰 손실을 입고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 주력은 완전히 붕궤된 것은 아니었다. 야율융서가 남진하는 동안 거란의 원정군 배후에 남아있던 고려군 병력들이 지역방어를 담당한 장수들에 의해 재편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율융서는 압록강을 넘은 지 한 달만에 곽주에 이어 서경을 함락시키고, 한 달 후인 다음 해 1월에는 고려의 수도 개경을 함락시키고 만다. 이 시기에 개경 외곽에는 나성이 세워지지 않고 있었다. 거란군의 주력이 개경을 향해 달려오자 현종(顯宗)과 고려 조정은 경기도 광주로 피신해 있다가 결국은 개경이 함락되고 말았다는 소식을 접하자 다시 피난길에 올라 전라도 나주로 내려갔다. 거란군에 의해 점령당한 개경은 궁궐을 포함한 성안의 모든 시설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거란군의 사정은 외형적으로 고려의 수도를 점령하여 기세를 올리기는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거란군 후방에 남아있던 고려군이 재편성되어 길게 늘어져 있던 거란군의 병참선을 차단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란의 군주 야율융서는 후방에 남겨 둔 20만의 거란군을 소부대로 나누어 그들의 병참선을 방어하게 했다. 그러나 소부대로 나뉘어진 거란군은 고려군에 의해 각개격파 당하여 그들은 더욱 어려운 처지에 떨어지게 되었다. 이때 거란군의 배후에서 맹활약했던 고려의 장수는 흥화진 방어책임자인 양규(楊規)와 귀주(龜州)의 별장 김숙흥(金叔興)이었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낀 야율융서는 고려로부터 왕이 직접 거란에 들어와 자기에게 조현을 들이고, 강동육주를 반환하겠다는 것 등의 지킬 리가 없는 공허한 약속만으로, 개경 점령 7일 만에 회군을 결정했다. 그는 북상 도중 양규와 김숙흥이 이끄는 고려군과 애전(艾田)에서 조우했다. 숫적으로 우세한 병력에 힘입은 거란군은 고려의 두 장수가 이끄는 고려군을 전멸시켰으나, 그에 반해 거란군 쪽에서도 전사한 고려군의 몇 배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다. 설상가상으로 거란군은 장기간에 걸친 전투로 피로가 겹쳐 대오에서 이탈하는 낙오병이 속출했다. 이로 인해 거란의 가용 병력은 처음 동원한 40만의 병력에서 10만 이하로 줄어버렸다. 야율융서는 전의를 상실한 거란군을 이끌고 자기 본국으로 황급히 퇴각을 시작했다.

병참선을 방어하기 위해 후방에 남겨 두었던 20만의 대군 역시 고려군에 의해 죽거나 포로로 잡히고 나머지는 북쪽으로 도망치기에 바빠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다. 개경에서 압록강까지 퇴각해야 하는 거란군의 퇴군길은 한마디로 고난의 길이 된 것이다.

1011년 2월, 고려군 장수 정성(鄭成)의 지휘하에 완전히 재편성된 고려군은 기진맥진한 거란군을 뒤를 맹렬히 추격하여, 수많은 침략군을 강물에 수장시키고 강동육주를 완전히 회복했다. 약 3개월에 걸친 이 전쟁에서 고려와 거란은 각각 30만 이상의 엄청난 인명 손실을 기록한 것이다.
이 전쟁 이후, 거란의 군주 성종은 고려에 대해 집요하게 강동육주를 반환하라는 요구를 계속했다. 그 와중에 두 나라 국경지대에서는 소규모의 무력충돌이 그치지 않았다.

야율융서는 1014년에서 1016년에 걸쳐 휘하 장수에게 군사를 주어 압록강을 도하하여 홍화진과 통주를 공격하기도 했으며, 거란의 사주를 받은 여진족들은 배를 타고 경상도 지방에 상륙하여 고려의 후방을 교란시키기도 했다. 고려 역시 1015년 거란족이 압록강에 다리를 건설하고 이를 방어하기 위한 성채를 쌓자 이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고, 또한 거란족들에게 협력하는 여진족들에 대한 군사적인 압력을 지속적으로 가했다.


3. 고요전쟁(高遼戰爭) 3차전 (기원 1018년)-귀주대첩

고려와 거란 양국의 국경선에서 긴장이 최고조에 올랐을 때 야율융서는 다시 한 번 고려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시도했다. 그는 대군을 몰고 내려갔다 보급선이 끊기는 바람에 회군했던 2차전의 실패를 거울 삼아 철저하게 준비했다. 우선 병력의 수를 줄이고 실전 경험이 풍부한 정예군으로만 10만을 편성했다. 보급품 역시 충분하게 준비해서 고려군의 후방 교란에 대비하고, 침공 일자는 12월, 청야작전이 별 의미가 없는 한겨울을 공격 개시일로 선택했다. 사령관은 소배압(蕭排押)은, 1차전 때 거란군의 사령관이었던 소손녕(蕭遜寧)의 친형으로, 형정관료 타입의 동생과는 달리 전장에서 이름을 떨친 백전노장의 무골이었다.

3차전을 벼르고 있기는 고려도 마찬가지였다. 비상사태가 아닌 평시에는 고려군은 2군6위라는 독특한 군제를 채택해, 기병1, 보병 3의 비율을 지키면서 약 4만 5천의 정도의 상비군을 유지했다. 하지만 비상사태를 맞이한 고려가 이때 동원한 병력은 약 20만, 상원수에 강감찬, 부원수에 강민첨, 개경방어사령관에는 김종현 등의 맹장들이 임명되었다. 고려가 방어군을 편성할 때 고지식하게 기병과 보병에 대해서 1대3의 비율을 지킨 것으로 봐서, 아마도 30만의 총병력 중 기병은 5만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양국은 모두 최선의 준비를 완료한 상태에서,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이 압록강을 넘으면서 곧바로 교전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소배압이 압록강을 건널 때, 강감찬 장군을 제외한 양측 지휘부는, 고려군은 산성과 요새 등을 배경으로 장기적인 소모전을 벌여 거란군을 상대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소배압은 무능한 장수가 아니었지만, 그 역시 이러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지루한 장기전을 준비하는 고려군의 허점을 찔러 속전속결로 개경까지 점령한 후, 만약 고려 국왕이 남으로 피신한다면 계속 추격해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고려군의 대장 강감찬의 작전은 다른 사람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원래 무과가 아닌 문과에 합격해 벼슬길에 오른 강감찬은 맹장 타입이기보다는 책사 타입의 전략가였다. 그는 거란군을 포함한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의표를 찔러 야전에서 정면승부로 나갔다.

이번 원정에서도 최초의 접전은 흥화진에서 였다. 강민첨이 지휘하는 1만 3천기의 고려군 기병대는 중도의 험지에서 매복해 있다가, 거란군이 흥화진에 도착하자 기습해 들어가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강감찬과 강민첨이 노린 것은 거란군에 대한 실질적인 타격에 앞서 심리적인 효과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흥화진에서 강감찬이 직접 냇물을 소가족으로 막았다가 일시에 터뜨려 대승을 했다는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강감찬의 본군은 흥화진에서 남동쪽으로 상당히 떨어진 안주 방면에 있었으며, 때는 음력 12월이라 북쪽 지역의 강물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에 수공을 펼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군은 첫 전투에서 거란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도 못한 상태였다. 소배압은 곧바로 병력을 수습해 전속력을 다해 남으로 진격을 계속했다. 소배압은 고려군이 방어하는 요새를 만날 때마다 우회하는 전술로 급속히 개경을 행해 진격해갔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강민첨이 지휘하는 고려군 기병들이 거란군의 배후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강민첨은 계속 거란군의 뒤를 추격하면서 각 지역의 방어군들과 연합해 잦은 교전을 유도했고, 이로써 거란군의 진격속도를 가능한 한 늦추려고 의도했다. 강감찬은 김종현이 지휘하는 1만기의 기병을 급히 개경으로 내려보내 수도의 수비를 보강했다. 강감찬이 부여한 임무와, 얼마 후 귀주 싸움에서의 활약상으로 보아, 강민첨의 기마군단은 거란군과 유사한 경무장 기병이고, 김졍현의 기병은 기마 궁수대의 천적이라고 할 있는 중장갑 기마대, 이른바 철기군이었다.

고려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빠르게 개경으로 진격하려는 소배압 군과 계속 전투를 도발하여 이를 저지하려는 강민첨 군의 기동전 때문에 전황은 사상 유례없는 이상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고려군과 거란군은 자주(평남 자산(紫山))의 내구산과 대동강 등에서 여러 차례의 접전을 벌이면서, 동시에 개경 부근까지 남하하게 된 것이다. 강민첨 군이 적은 수의 병력으로 소배압 군과 접전을 벌일 수 있던 이유는, 양군 모두 백병전을 극도로 피하고 장거리에서 활로 공격하고 빠지는 히트앤런 전술을 사용한데다, 유사시 곳곳에서 있는 고려군 요새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배압은 강민첨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고하고 1019년 정월에 개경 북방 백 리, 지금의 황해도 신계까지 일단 진출하는 데 성공한다. 1차침입 때 이차전 때 야율융서가 직접 군을 이끌고 침공했을 때와는 달리, 고려의 현종은 피신하지 않고 개경에 머물면서, 그 지역의 백성과 곡식을 모두 성안으로 옮기고 가옥을 모두 철거하도록 명령했다.

성을 둘러싼 완벽한 방어시설과 철기군이 버티고 있는 송악성을 본 소배압은 개경 공격을 포기하고 회군하기로 결심했다. 후일 거란뿐만 아니라 몽골 등의 다른 기마 궁수대 역시 유럽의 기사단과 같은 중무장 기병대를 만나 전투를 벌일 경우 일대일 전투력에서는 언제나 우위를 점할 수 없었다. 따라서 대부분 기만전술이나 유인전술을 사용해 적을 지치게 하거나 완전히 포위해, 근거리에서의 조준사격을 통해 이들과 상대하곤 했다. 중무장 기병들은 기동전에서 기마 궁수대를 상대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던 것이다. 고려 역시 그간에 있었던 거란과의 전투들을 분석하고 기동전에서의 약점을 보완했던 것이 틀림없다.

해가 바뀌어 1019년 정월, 거란군은 남하했던 속도와 비슷한 속도로 회군을 위한 북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강감찬은 개경까지 진격했던 거란군을 고이 보내주려고 하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철저한 대비를 통해 그들을 완전히 압도하겠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것도 요새에서의 수정전이나 진지전이 아닌, 거란군이 특기로 삼고 있는 기동전을 통한 전면승부로써 그들을 궤멸시키려고 한 것이다. 강감찬은 흩어져 있던 고려군을 모두 귀주로 집결시켜 북상하는 거란군을 기다렸다. 소배압의 입장에서도 고려군이 산성이나 요새에서 나와 벌판에 진을 치고 회전을 기린다면 이것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선발대로부터 고려군의 주력부대가 귀주에서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소배압 역시 귀주성 부근의 평야지대로 거란의 전군을 진격시켰다.

이렇게 해서 동년 2월 1일 26년간 지속되었던 고려와 거란의 싸움을 총결산하는 한판 승부가 귀주의 야트막한 구릉지대에서 펼쳐지게 되었다. 일부의 기록에서는 이 전투 이전에 이미 고려군이 개경까지 남하하는 소배압 군을 곳곳에서 격파했다고 적고 있지만, 이날의 전투상황을 보면 거란군은 그간 결정적인 피해를 입지 않고 막강한 전투력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기록으로부터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추리하고자 한다면, 당시의 기록이란 대부분 대국민 홍보를 위한 자료들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날 격전이 벌어졌던 귀주 부근의 지형은 산지가 아닌 구릉지대라 거란군이 기동력이 크게 위축되는 곳은 아니었지만 그 최대 폭이 약 4키로미터 정도로 그리 넓은 곳은 아니다. 따라서 앞뒤로의 기동은 자유롭지만 좌우로의 기동에는 제한을 받는다. 다시 말하면, 다수의 거란군 기병대가 고려군을 크게 우회해서 앞뒤에서 동시에 협공을 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형 때문에 양군은 종심이 깊은 대형을 취했다.

먼저 유리한 장소를 선점한 쪽은 기동력에서 월등한 거란군이었다. 소배압은 휘하의 병력을 산개시키면서 바람을 등지도록 진형을 갖추데 성공한다. 이것은 사거리가 긴 고려군의 활을 감안했을 때 매우 중요하고 기민한 조치였다. 양군의 활이 공중을 향해 45도 각도로 지향 사격했을 때 3-4백미터 이상 날아감으로, 양군은 최소한 500미터 이상의 거리를 두고 마주본 상태에서 대치했을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 때문인지, 고대의 전쟁은 양군의 장군이 선수에 서서 큰 소리를 지르며 돌격하고, 뒤따라 보병이건 기병이건 뒤 섞여 백병전을 전개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 고대의 전투, 특히 아시아에서의 전투는 대부분 그런 식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지휘부는 뒤쪽에서 커다란 북과 여러 개의 수기를 세워 그것으로 전투를 지휘하며, 또한 지휘부와 본진, 좌우익 사이로 부지런히 다수의 전령이 오가면서 비교적 조용하고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다. 따라서 지휘관의 용맹보다는 정확한 상황파악과 대처 능력이 훨씬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강감찬과 소배압 역시 다수의 참모진, 전령들과 함께 비교적 안전한 후방에서 냉철하게 전황을 실피변서 북과 기, 그리고 전령들로 전투를 재휘했다.
양군의 진형을 보면 기마 궁수대 일변도로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는 거란군의 전체 병력은 중앙부와 좌우 모두 3개의 부대로 나누어 여러 열로 도열하고, 그들의 뒤에는 화살을 가득 실은 수레들이 수백 대 늘어서 있는 진형을 갖추고 있었다. 수레 뒤에는 본진과 좌우익의 지휘부 막사가 있고 그 뒤로는 전투의 진행상황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약간 높은 곳에 소배압의 지휘부가 위치해 있었다. 고려군 역시 본진과 좌우익 세 개의 전투단위로 나뉘어진 것은 같지만, 그 구성은 거란군보다 훨씬 복잡했다. 각 단위부대들이 거대한 방패를 땅에 박아 세워 자신들과 바로 뒤에 궁수대를 보호했다. 궁수대 뒤로는 거란군과 마찬가지로 화살을 가득 실은 수레가 그리고 그 뒤로 경무장 기병대를 배치했다. 이들 기병대는 좌우로 돌아 들어오는 거란군 기병대를 요격해 격퇴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뒤로 강감찬의 지휘부가 위치해 있다. 양측 모두 맨 앞에서부터 지휘부까지의 거리가 수백 미터에 달하는, 종심이 깊은 대형이었다.

이날의 전투는 현대의 소총 사격전과 유사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거란군이 10만이라고 해서 그 병력을 일시에 돌격시키는 것은 아니다. 가장 앞 열에 있던 수천 명의 정도의 병력이 소배압의 신호와 함께 앞으로 돌진하며 전투가 개시되었다. 화살을 공중으로 지향 사격했을 때의 거리는 무척 길지만, 고려군은 정확하게 조준해서 사격하는 거리의 기준을 100보, 약 60미터로 했다. 이 기준은 거란군 역시 비슷했다. 거란군이 약 300미터 거리로 좁혀오자 고려군 궁수대 중 후미의 열이 공중 45도 각도의 지향사격을 시작했다. 빗발치듯 날아오는 화살에 다수의 거란군이 맞아 쓰러졌다. 하지만 쓰러진 군사들보다도 훨씬 많은 수의 거란군 기병들은 유효사거리인 60미터까지 고려군과의 거리를 좁히는 데 성공하자, 말머리를 돌려 고려군의 방어선과 나란히 달리면서 화살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고려군 역시 조준사격을 시작하고, 양측간 치열한 사격전이 전개되면서 다수의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이 때 거란군의 제 2열이 고려군의 화살 방어막을 뚫고 돌격하기 시작했다. 화살이 떨어져 공격을 끝낸 거란군 제1열은 대열의 맨 뒤로 후퇴해서 화살을 보충했다. 양측 모두 병사 한 명이 1분에 최대 열 다섯 발 정도의 화살을 발사할 수 있기 때문에 보급해야 할 화살의 양은 엄청나게 많았다. 화살을 보급 받은 제1열은 가뿐 숨을 몰아 쉬면서 대형의 맨 뒤쪽으로 도열했다. 이런 방법으로 행해진 전투는 본진과 좌우익 세 곳에서 동시에 진행되어 양군의 피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속 늘어났다.

그러자 갑자기 거란군의 후미 몇 열이 좌우익으로 동시에 돌아 나오며 고려군을 우회하여 후방을 노렸다. 그러자 고려군의 부원수 강민첨이 직접 지휘하는 고려군 기병대가 즉각 출동해서 요격해 나섰다. 양군은 전장의 좌우익 바깥쪽에서 나란히 달리면서 치열한 사격전을 전개했다. 고려군의 배후로 우회할 수 없다고 판단한 거란군은 자기 위치로 돌아가고 고려군 역시 원위치로 돌아와 화살을 보충했다. 그제야 강감찬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고려군의 중앙부에 쪽에서 갑자기 일부 보병대가 돌출하면서 검차를 앞세워 밀고 나왔다. 그들은 거란군의 중앙을 돌파한 후 후미공격을 노리게 되었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소배압은 중앙군의 지휘부로 전령을 보내 군령을 전했다. 소배압의 명령에 따라 거란군은 고려군 본진에 대한 돌진을 중지하고 검차를 밀고 있는 고려군의 검수들을 향했다. 그러나 고려군은 방패로 몸을 보호하면서 검차 뒤에 바싹 붙어 돌격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정면에서 그들을 저지할 수 없었다. 거란군은 여러 개의 열을 돌진시켜 고려의 검차 부대의 후면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고려군의 궁수들이 쏘아대는 화살 때문에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결국 거란군은 중앙군이 아닌 좌우익으로부터 차출된 지원군이 고려군의 검차부대 후미에 따라 붙을 수 있었다. 이에 고려군 검차부대는 많은 사상자와 검차를 버려 두고 본대로 퇴각했다.

이렇게 전투가 여러 차례 진행되는 동안 양군 모두가 몇 번의 위기를 넘기고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소모전을 벌렸다. 강감찬과 소배압은 모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팽팽한 균형상태는 양군이 동시에 전멸할 때까지 계속될 것만 같은 양패구상(兩敗俱傷)의 국면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그날의 행운은 고려군의 것이었다. 개경을 지키기 위해 래려 보냈던 김종현의 중무장 기병대가 귀주의 회전장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강감찬이 개졍에 있어야할 그들이 왜 회전장까지 오게 되었는지 물어볼 틈도 없이, 김종현은 도착하자마자 곧바도 1만의 기마부대 선두에 서서 거란군의 본진을 행해 맹렬히 돌진해 갔다. 갑자기 고려의 중무장 기병대가 한 덩어리가 되어 들이닥치자 소배압과 거란군은 대응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팽팽한 균형상태는 삽시간에 깨져버렸다. 긴창과 튼튼한 갑조로 중무한한 고려의 중무장 기병대에, 활 이외는 가느다란 검 밖에 갖고 있지 않은 경무장의 거란군 기병대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기병대가 서로 얽혀 백병전에 들어감으로 해서 거란 기병대의 주무기인 활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거란군의 중앙부가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거란군의 긴 종심은 고려의 중무장 기병대에 의해 돌파되어버렸다.

김종현이 이끌던 기병대가 거란군의 중앙을 양분하고 낸 길을 강민첨의 기병대가 돌진해 들어가고, 그 뒤를 고려군 보병들이 궁수들의 엄호를 받으며 일제히 검차를 앞세우고 돌격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거란군은 포위되어 고려군의 보병과 기병대를 전면과 배후에서 각각 맞이해서 싸워야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거란군의 후미에 화살을 싣고 있던 수레들이 고려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김종현의 중무장 기병대가 거란군의 지휘부를 향해 돌진해 들어가자, 거란군은 대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이로써 거란군의 지휘계통은 무너지고, 이후로는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대학살이 전개되었다. 10만에 달하는 거란 원정군 중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단지 몇 천 명에 불과했다. 이 회전에서 소배압 역시 투구와 갑옷을 벗어버리고 일반 군사들 틈에 끼어 도망쳤다.

야율융서는 대패한 소배압에게 " 네놈의 얼굴 가죽을 벗겨버리겠다."라고 폭언을 하며 그를 책망했지만, 귀주회전에서의 패전은 단지 소배압의 무능력으로 인해서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있었다. 또한 소배압은 야율융서의 외삼촌이기도 했다. 그는 야율융서의 모후인 소태후의 동생이었다. 소배압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고려와 거란의 30년 가까운 싸움에서 거란이 그때까지 행한 수많은 싸움에서 얻은 ' 싸우면 이긴다'라는 불패신화가 고려군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이 회전으로 인하여 후일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잡게 되는 여진족들과 또한 거란에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았던 중국의 송나라 정권에게 거란군의 막강한 전투력에 대한 공포감을 벗어나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투가 있고 몇 십 년 후, 거란의 지배에서 벗어나 몽골과 만주의 대평원의 주인이 된 여진족이 일어나 금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출전 : 활이 바꾼 세계사 출판사 : 가람기흭 저자 : 김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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